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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에 대한 단상

눈은 청산에 있고 귀는 거문고에 있으니
세상의 무슨 일이 내 마음에 이르리요
가슴 가득한 호연지기를 아는 이 없으니
한 곡의 미친 노래를 홀로 읊어 보노라
( 고산 윤선도, '낙서재에서 우연히 읊다' 전문)


고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오늘 아침 동천다려 숲길을 지나 세연정으로 향하며 문득 고산과 그의 시대를 떠올립니다.
세연정과 세연지, 회수담, 동대와 서대, 토성의 흔적들, 고산이 남기고 간 것들을 따라 걸으며 그가 꾸었던 꿈과 큰기미 절벽 아래 무너져 버린 그의 야망에 대해 생각합니다.
고산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고산이 평생을 걸쳐 꾸었던 꿈이 권력을 향해 달음질치다 주저앉는 그런 꿈에 불과했을까.
그는 어째서 정여립처럼, 허균처럼 인간해방의 꿈을 꾸지는 못했을까.
나는 여전히 그 꿈을 잃지 않고 있는 걸까.

내가 고산을 처음 만났던 것이 언제였을까요.
아주 어릴적 할아버지와 할머니, 염소와 오리, 닭들을 막 지각하고 구별해내던 그 무렵부터였을 겁니다.
지관이었던 할아버지가 늘 윤고산, 윤고산 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나는 윤고산을 이웃마을 사는 할아버지의 친구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묘자리를 잡고 집터를 찾는 할아버지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으며, 부용리와 부황리 주민들 가운데 살아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억겁의 시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400년이란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요.

국민학교 5학년때 보길도를 떠나 인천으로 이주한 뒤 나의 의식 속에서 고산도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면서 고향에 남은 친구들, 마을 어른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는 것과 같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중학교 교과서에선가 고산을 조우하고 아주 많이 놀랐습니다.
그것은 고산이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지은 유명한 시인이었다해서가 아닙니다.
고산이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니!
그가 이미 수백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의 의식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오우가나 어부사시사는 국어 교사들이 상찬하던 것과는 달리 나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이라니!
그런데도 그렇게 산 사람들의 의식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니!
그 의문만이 오래도록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세연정이며 세연지, 회수담 등 고산이 축조했던 구조물과 연못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었다는 것은 그로부터도 한 참 뒤에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입니다.
동천석실이며 낙서재, 곡수당, 낭음계 이런 이름들은 들어 본적도 없었습니다.
국민학교때 피리 낚시를 하던 낚시터가 세연지였으며, 미술 시간에 진흙을 퍼다 공작을 하던 곳이 세연정 자리였고, 민방위 훈련 시간에 대피했던 방공호가 봉화대며 토성이었습니다.
그후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만난 고산은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뜻밖에도 그는 더이상 낭만적인 시인이 아니라 지배자로 군림하며 섬 주민들을 억압한 독재자였던 것이지요.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금 나는 고향에 돌아와 고산의 정원 근처에 둥지를 틀고 살며 다시 고산을 만납니다.
광해군 시절 30세 백면 서생의 몸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이첨, 유희분 등 권신들의 부패와 전횡을 탄핵하다 귀양살이를 떠난 실천적 지식인 고산.
쉰한살의 나이에 13세 소녀였던 설씨녀를 만나 평생을 사랑한 열정적인 로맨티스트 고산.
그는 가는 곳마다 스스로 설계한 건물을 세우고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정원을 꾸민 뛰어난 건축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가진 막대한 부를 임진, 병자 양대 전쟁 이후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위해 사용하기보다는 자기 왕국을 꾸미는 데 허비해 버린 이기적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탈속적인 시인이라는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70이 넘어서까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중앙 정계의 권력 투쟁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다 10여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던 지극히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밤사이 내린 비로 세연지에 물이 가득합니다.
아직 이른 시각인데 배낭을 맨 여행자 몇이 정자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봉순이와 꺽정이가 짖어댑니다. 누가 찾아온 걸까.
서둘러 동천다려로 발길을 돌립니다.
하지만 굴뚝다리를 건너 동천다려로 돌아오면서도 나는 시대와 인간의 다면성에 대한 깊은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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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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