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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8월의 무심한 태양 아래 남과 북 삼천리 산하에 통곡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을 보았으며, 반세기 어이없는 백발의 시간으로 한 맺혔던 가슴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어느새 하나로 녹아 내리는 것을 또한 뜨거운 마음으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인생이란 누구나 더 이상 앞으로 가려해야 갈데 없는 깎아지른 절벽 하나쯤은 아무도 모르게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듯, 억장이 무너지는 세월을 헤쳐오면서 헤아릴 길 없는 사연을 저마다 영혼 깊숙이 묻어온 이들의 만남은 한편 감격스러우면서도 또 한편, 잔인하기조차 합니다.

역사적인 남북 이산가족상봉이 열린 15일 평양 고려호텔 상봉장에서 남측 양영애(왼쪽)씨가 북축 동생 양후열씨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그 부모에 못지 않게 이미 어찌 돌이킬 수 없이 파삭 늙어버린 자식의 굵게 패인 주름살을 안타깝게 더듬는 90 노모의 가슴은 50여 년 전 귀엽던 아들의 아스라한 흔적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미어졌을 것이며, 그 늙으신 어머니의 부스러질 듯 마른 체구와 병든 몸을 안은 아들은 불효의 한스러움을 서럽고도 서럽게 되새겼을 것입니다.

장장 1백년의 허리를 꺽은 반세기의 수절로 돌아온 아내의 노구 앞에서 떨리는 손을 잡은 늙은 신랑은 자신의 죄도 아닌 것을,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수없이 되뇌이며 부질없이 흘러가고 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숙명을 아파합니다.

이토록 한걸음에 달려올 지척의 길을 그 동안 무엇이 가로막고 있었길래, 그만 바로 이틀 앞서가신 어머니의 영정을 붙들고 절통해하는 이의 눈물은 우리 모두의 눈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엄마, 엄마 우리 엄마" 하면서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란 다하여라"의 심사로 이제 가고 안 계신 모친을 향해 사모곡(思母曲)을 비통하게 부르는 노시인의 출렁거리는 눈시울에는 우리 모두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비장함이 있습니다.

형과 아우를 찾는 울부짖음과 오빠와 동생을 서로 부르며 애타게 보낸 시간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몸부림은 전쟁과 분단의 고난을 통과해온 우리 민족이 그간 살아온 처절한 내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이 처연한 통곡 뒤에 오는 웃음 또한 누구도 막지 못하는 세월의 섭리인가 합니다. 계절이 무수히 바뀌어도 봄은 오지 않았으며, 빼앗긴 인생의 절반은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는 그간의 뼈아픈 현실을 딛고 이들이 손에 마침내 감아쥔 것은 아, 꿈에도 잊지 못했던 혈육의 정이었으며 그 정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기쁨이었습니다.

"살아 있어 주어 고맙다", 이 목 메인 한마디를 속절없이 토해내기 위해 우리의 겨울은 그토록 길었고, 소쩍새가 우는 밤은 그리 깊었는가 봅니다.

스무살 꽃다운 새색시가 열 두달 삼백일 하얗게 새면서 언제 님이 오실까 사릿문 열고 지나는 발자국 소리마다 두근거리며 귀기울였던 날도 이제 아득한 옛일, 하지만 이젠 아버지처럼 늙은 낭군 앞에서 새색시의 부끄러움으로 돌아가는 파파 할머니의 분홍빛 가슴은 어쩔 수 없는 부부의 사연인가 합니다.

누가 보아도 한 핏줄임을 금새 알 수 있는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아들, 형제와 자매의 똑 닮은 모습은 신기하기만 합니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거늘, 시절이 좋은지 팔십 구십이 넘으신 어르신들이 그 인고(忍苦)의 인생사를 겪으면서 생존해 계시는 모습은 한편, "아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구나" 하는 삶에 대한 욕심 아닌 욕심을 불러 일으키기 조차 합니다.

꽃은 세상에 어디 장미꽃, 백합화, 개나리만 있겠습니까? 꽃 중에 꽃은 웃음꽃이 아닙니까. 생사를 모르고 흩어져 살다가 만난 이들이 피워낸 꽃은 그래서 이 세상에 으뜸 꽃입니다. 그 꽃은 때가 이르면 씨앗을 내어 삼천리 강산에 흩날리면서 통일이라는 새로운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의 역사적인 현장인 코엑스에서 15일 북의 아들 조진용(69,좌)씨가 어머니 정선화(94)씨를 만나 감격의 포옹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그러나, 몇 날 몇 밤을 새워도 다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이들은 곧 또다시 기약 없는 헤어짐으로 뼈를 깍고 피를 말려야 할 것입니다. 애간장을 끓여야 할 것입니다. 다시는 못 볼 상여를 붙들 듯 "이눔아, 어디 가냐. 못간다. 이제 가면 언제 보나."를 울부짖다 혼절할 어머니를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자식의 슬픔을 담아낼 바다와 하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생이별의 발길이 즈려 밟고 갈 약산의 진달래도 지금 없는 날의 우울함을 달래줄 노래 또한 어디에도 없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불러보았다는 "아버지" 소리 앞에서 얼어붙듯 서있던 할아버지는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던 딸의 얼굴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시간이 그대로 정지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이 모든 고통을 풀 답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압니다. 그것은 누구도 그 오고감을 가로막지 못하는 통일인 것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지 아니합니까? 지금 우리가 통일을 할 수 없다는 온갖 이유와 이론과 설명, 그리고 조건들은 다 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남과 북을 오고 가는 발길을 가로막고 불법시 하고 있는 일체의 장치는 모두 민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요, 이 깊고 깊은 통곡의 한을 즐기는 가학적 폭력에 다름이 아닙니다. 통일할 의사가 확고하게 없기 때문에 통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다부지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통일이 된다고 인간사의 모든 과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더욱 큰 짐을 우리민족은 무겁게 지고 가야 합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 주최로 16일 서울 신사동 삼원가든에서 열린 만찬에서 북측 임재혁씨가 남측 아버지 임휘경씨와 함께 식사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이제부터 모든 민족적 행위와 결단은 바로 이 민족의 혈맥을 새롭게 이어나가는 작업에 모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의 내면에 사랑과 희망과 열정을 아름답게 회복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인간사의 비극을 그대로 보고 방치하지 않는 참된 인간이 되어나갈 것이며 오늘의 인류사회에 뜨거운 양심과 빛나는 평화의 등불로 존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상봉이 뿜어내는 민족적 요구, 그리고 그 만남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민족 전체의 위대한 저력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번 만남에서 우리민족이 얻게 된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이 자산을 훌륭하게 키워 민족의 미래를 밝고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이제 우리에게 숙제로 남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1백살 노모가 그리던 아들을 보고 닫혔던 입을 열어 말문이 트였듯이 우리 민족사는 새롭게 쓰여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의 은총 앞에서 우리 겨레의 앞날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날들이 펼쳐지기를 비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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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기자는 경희대 교수를 역임, 현재 조선학, 생태문명, 정치윤리, 세계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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