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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싶은 분에게 추천해드릴 책이 있습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이라구요, 오늘은 이 책을 통해 이야기를 해보죠. 왠 책이야기냐구요? 지난번 메일진 이후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 책만큼 생각을 곱씹게 하는 게 없었거든요.

'거대한 체스판'은 미국 카터 행정부에서 세계 전략을 책임졌던, 클린턴 행정부에도 영향력을 휘둘렀던 브레진스키가 미국의 후손들에게 전하는 글입니다.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 미국이 어떻게 체스를 움직이면서 '세계 유일강대국으로서의 패권을 유지할 것인가, 자랑스런 미국의 후예들아, 이런 점을 잊지 말아라'하는 그런 이야기죠.

망한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나 영국은 자기들이 세계 강국이라 착각하지만 별거 아니고, 중국도 커봤자 지역 강국이고, 현재 미국에 도전하는 세력은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 상태를 유지, 세상을 계속 미국 입맛에 맞게 요리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인가.

잠재력 있는 놈들이 미국의 일등지위를 위협할만큼 성장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할 것인가. 예컨대 러시아의 경우 경제원조를 어디까지 할거냐 (IMF를 통해 지원하고 있지만 그러다 쓰러진 범을 다시 키워서는 안되는데)는 문제가 딜레마랍니다. 이같은 세계 지배 문제에 대해 브레진스키는 거친 용어라고 전제, 이렇게 표현합니다.

"속방간의 결탁을 방지하고 안보적 의존성을 유지시키며, 조공국을 계속 순응적인 피보호국으로 남아있게 만들고, 야만족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막는 일"이라구요.

여기서 속방이나 조공국, 야만족은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각국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 적용시켜보자면 남한이 이웃국가와 결탁, 미국에 반항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남한의 안보 의존성을 유지시키고, 순응적인 피보호국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거죠.

당연히 남북 통일은 말도 안되는 일이 됩니다.
브레진스키는 "한국이 통일되지 않도록 현상유지에 힘쓰되 주한미군은 절대 철수시켜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브레진스키는 남한이 '체스판'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도 재미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국은 식민지를 만들거나 옛 제국처럼 군사력을 앞세워 땅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등 집단 안보체제, APEC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비롯, 세계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같은 경제기구, 국제재판소같은 국제법 구조 등이 모두 미국 체제의 속성을 복제하고 제도화하기 위한 첨병이라는 것입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결코 아니지만 브레진스키의 솔직한 직설화법이 다소 놀랍습니다.

실제로 남북정상회담 이후 각종 외신에서 접하는 미국의 반응은 날카로웠습니다. 일단 환영, 그리고 신중한 환영, 그리고 백악관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평가를 바꾸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죠. 남북이 50년만에 손을 잡든 말든, 아무튼 최근 '불량국가'에서 '우려대상국'으로 표현이 바뀐 북한의 위협은 그대로다, 세계 안보를 위해 미국은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는 거죠.

미국의 최대 현안인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 추진문제가 북한의 이미지 개선 덕분에 흔들리는 상황이지만, 미국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NMD문제는 따로 다뤄야할만큼 복잡하니까 이쯤에서 넘어가죠.

남북정상회담 이후 국제부 기자도 바빴습니다. 통일부 출입기자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만 각국 반응을 정리해야 하니까요. 지난주까지도 각국 한반도정책 전망 기사가 나갔습니다.

이래저래 각국 반응을 보면, 미국은 브레진스키의 '지침'에 따르는 분위기고, 나머지 국가는 이 와중에 어떻게 내 떡 하나 더 챙겨먹을까 하는 분위기입니다. 중국은 연일 '미군철수'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건 한반도와 국경을 접한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거고, 러시아는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틈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경협이나 챙겨보자는 거죠.

미국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던 '양키 고홈'을 철없이 외칠 단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브레진스키처럼 훌륭한 전략가가 '세계 유일 강국 미국이여 영원하라'고 후세들에게 가르침을 남길 때 최소한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쳐야겠죠. 우리가 '졸'로 이용돼 전략상 장렬히 전사하는 건 싫지 않습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가 '이지페이퍼'등에서 메일매거진으로 발행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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