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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C통신 게시판의 춘추전국시대

사이버스페이스를 무대로 활동하는 대안 미디어들은 짧은 기간 동안 끊임없이 자기 진화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사이버스페이스 대안 미디어들의 진화가 시작된 곳은 PC통신 게시판이었다.

 

아직까지 인터넷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에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 국내 4대 PC통신망에 마련된 게시판에는 하루에도 수천 개가 넘는 네티즌들의 글이 올라와서 읽혀지는 성대한 여론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민감한 시사적 현안에서부터 "HOT와 젝스키스 중 누가 더 뛰어난가?" 하는 연예계 이야기까지, 공개석상에서 금기시 되어 왔던 성담론에서부터 혁명을 부르짖는 급진적 목소리까지, 그리고 개개인의 작은 일상사에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억울한 처지를 알리는 호소문에 이르기까지 여론의 스펙트럼은 다양하게 펼쳐져 있었다.

 

기성 언론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뉴스들이 게시판을 통해 전파되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가 하면,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가 통신망을 타고 네티즌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특정 현안을 둘러싸고 불꽃튀는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화려한 글솜씨와 탄탄한 논리의 전개, 폭넓은 지식과 독창적인 해석력을 바탕으로 네티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이 탄생했다. 글 한편이 게시될 때마다 순식간에 수백에서 수천이 넘는 조회수가 기록되는 등 독특한 카리스마로 PC통신 여론을 주도하며 스타급의 위치에 등극한 이른바 '통신논객'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저마다 고유한 필살기를 휘두르며 여기저기를 종횡무진 누볐던 논객들의 맹활약으로 PC통신 게시판이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한 무렵, 그동안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신형 필살기를 선보이며 천하통일을 꿈꾸는 새로운 고수가 출현하니, 바로 <보테저널>이다.

 

2) PC통신의 정간물 : 보테저널

<보테저널>은 그 등장부터 남달랐다. 내노라하는 통신 논객들이 자신의 ID와 닉네임으로 산발적인 개인 플레이를 했던 것과 달리, <보테저널>은 정기 간행물을 표방하고 나왔다. 그 당시만 해도 통신 공간에서 언론사가 아닌 일 개인이 정기 간행물을 만들어 내보낸다는 발상 자체가 대단히 신선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개성있는 언어와 감각적인 논평으로 네티즌들을 사로잡은 <보테저널>의 발행인 최진순씨는 본명보다는 '보테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폭넓은 인기를 구가하며 대안 언론 초창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특히 <보테저널>은 그래픽 지원이 되지 않는 PC통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안시 기법을 사용한 그림까지 제공함으로써 조잡하나마 잡지로서의 구색을 갖추려고 했다. 또한 게시판의 단골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사이버 기자'를 자청하여 자신의 글을 기고하는 등 <보테저널>은 오늘날 인터넷 언론들에서 보여지는 운영 기법의 전형을 최초로 시도한 미디어로 기억될 만 하다.

 

하지만 <보테저널>은 대안 미디어의 선구자적 실험에도 불구하고 PC통신 환경이라는 시대적 운명으로 인해 더 이상의 성장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보테저널>이 발행되던 공간은 인터넷 웹사이트처럼 자기 고유의 주소를 가진 독립적 공간이 아니라 PC통신사가 제공하는 게시판이었다.

 

따라서 게시판에 올라온 수많은 텍스트 게시물 중의 하나였을 뿐, 독립 미디어로 뚜렷하게 부각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보테저널>에 담긴 컨텐츠 역시 기성 언론에 보도된 사실을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에 그쳤을 뿐, 독자적인 취재를 통해 고유의 기사를 발굴·보도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보테저널>의 실험에 자극을 받은 다른 논객들도 잇달아 유사한 형태의 정기 간행물을 선보였다. 이들 대부분은 조만간 열릴 본격적인 인터넷 시대를 맞아 대안 미디어의 개척자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그 중 눈여겨 볼 사람이 바로 잘 알려진 <딴지일보>의 김어준씨이다.

 

3) 인터넷 패러디 미디어의 대표주자 : 딴지일보

"본지는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시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이며......우끼고 자빠진 각종 사회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엽기적인' 창간 선언문을 내놓으며 인터넷 공간에 첫 선을 보인 <딴지일보>는 선풍적인 인기몰이에 성공하면서 순식간에 인터넷 대안 미디어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딴지일보의 필살기는 정치와 성을 소재로 한 삐딱한 딴지걸기와 기상천외한 패러디였으며, 그 최초의 희생양은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이었다.

 

독설적이면서 직선적인 김어준씨의 언어는 독자들에게 재미와 함께 현실 권력과 금기에 대한 도발과 전복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였고, 이는 곧 폭로와 저항의 문화를 네티즌들로부터 폭넓게 이끌어 냄으로써 참여의 장을 넓힐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대안 미디어 전략으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전략은 <딴지일보>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한계 지어버린 치명적 업보이기도 했다. 패러디를 통한 비판과 풍자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신뢰성을 심어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딴지일보>를 즐기면서도 이를 비중있는 정보원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딴지일보>의 독설과 야유로 자극된 비판정신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쾌락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쉴 사이 없이 현실을 흔들어대지 않는 한 패러디의 생명력은 금방 소진되고 만다. 비판의 지속성이나 대안 제시, 여론의 형성과 같은 공공 언론의 기능을 담당하기에 패러디 언론은 역부족이었다.

 

그래서인지 대중적 성공을 거둔 이후 <딴지일보>는 비판적 기능을 포기한 채 상업적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편입되는 제도화의 길을 택함으로써 패러디를 뛰어넘은 정론지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4) 패러디 미디어의 백가쟁명기

<딴지일보>의 성공은 국내 인터넷 공간에 '패러디 미디어'의 붐을 불러 일으켰다. PC통신 게시판을 주름잡던 고수급 논객들이 대거 인터넷으로 진출하여 저마다 독특한 이름의 패러디 사이트를 선보였다. <스키조선>, <패러디한겨레21>, <수세미일보>, <보일아동> 등 기성 언론을 패러디한 사이트들이 대거 등장했고, <망치일보>, <대자보>, <더럽지>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1999년 7월 부정기 간행물 형태였던 기존 패러디 사이트와의 차별화를 선언하고 인터넷 최초의 독립 일간지인 <온라인 뉴스>가 창간되기에 이르면서 사이버스페이스는 가히 인터넷 대안 미디어의 백가쟁명기로 접어드는 듯 했다.

 

그러나 'All or Nothing"이라는 인터넷 비즈니스의 법칙처럼 이들은 <딴지일보>의 성공을 따라가지 못한 채 대부분 단명하고 말았다. 이들이 좌초한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영세한 자금력을 꼽을 수 있다. 별다른 수익구조를 마련하지 못한 채 몇몇 소수 인력의 헌신적 노력만으로 꾸준히 웹사이트를 유지·운영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발행인들은 투자자를 유치하여 전업적으로 매달리기도 했지만 누적되는 적자와 기사의 논조 완화를 요구하는 투자자들의 외압을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발행을 포기하게 되었다.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실패 원인은 이들이 자기 고유의 색깔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슷비슷한 정치적 색채를 보이며 <딴지일보>를 흉내내기에 급급한 기사로서는 더 이상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이는 자기 고유의 색깔을 모색한 미디어만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로서도 입증되는데, 특히 <망치일보>와 <더럽지>가 주목할 만하다. <망치일보>는 대부분의 미디어들과는 반대로 '친 한나라당'이라는 분명한 정치적 색깔을 과시하며 차별화에 나섰다.

 

그리고 <더럽지>는 네티즌들의 뜨거운 반향을 몰고 왔던 '동국합섬 노동자 정희양씨'의 사건의 심층 취재·보도를 계기로 서민들의 '고발·제보' 미디어로 뚜렷한 자기 입지를 확보했다.

 

5) 정규군을 꿈꾸는 뉴스게릴라 : 오마이뉴스

화려하지만 짦았던 패러디 미디어의 백가쟁명기가 막을 내릴 즈음 사이버스페이스의 독립 미디어계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사실상 웹진의 형태를 띠었던 종래의 미디어들과는 달리 일간지 형태의 본격적인 정기 간행물을 표방하는 웹페이퍼(Web-Paper)들이 대거 출현한 것이다.

 

이들 신진 웹페이퍼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머니 투데이>, <아이뉴스 24>, <아이비즈 투데이> 등 경제, 정보통신 정보와 같이 신속성을 생명으로 하는 특화된 뉴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곳이다. 다른 하나는 <세이 월드>, <넷피니언>, <데일리 클릭>, <뉴스보이> 그리고 <오마이뉴스> 등 종합지 성격을 띤 곳이다.

 

PC통신 시절의 제1세대 독립 미디어, 패러디를 앞세운 제2세대 독립 미디어를 이어 제3세대 독립 미디어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은 앞서의 미디어들과 달리 일정 규모의 자금력을 갖춘 전업형 언론으로, 자체 취재진과 회원제 사이버 기자진을 운영하면서 독자적인 취재·보도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가장 진화된 형태의 미디어라 할 수 있다.

 

특히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걸고 2000년 2월 22일에 창간된 <오마이뉴스>는 웹페이퍼의 특성을 활용한 실험적 보도 방식, 언론 개혁을 통한 사회 민주화라는 선명한 지향점, 그리고 기성 언론을 앞지른 몇 차례의 특종을 통해 현재 가장 주목받는 인터넷 대안 미디어로 급부상했다.


#대안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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