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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침에 일어나 보면 옛날에 엄마가 숟가락에 꿀과 함께 개어 먹여주던 노란 항생제 가루. 딱 그 색깔하고 똑같은 송진가루가 네이비 블루 색깔의 내 차를 덮기 시작했다.

나무하면 아틀란타가 빠져서는 안 되는데 여긴 소나무가 많거든.
조금만 더 있으면 아침저녁 물을 끼얹어 차를 닦아야 할만큼 노랗게 덮이겠지.

여기는 가까운 산도 없지만 굳이 산에 오르지 않더라도 10분에서 30분 거리에 50피트 이상 되는 울창한 삼림과 아름다운 호수를 볼 수 있는 공원들이 여러 개 있어.

버클리 레이크, 차타후치 강변, 레이크 리니어, 존스 브리지 파크...

이 곳들은 여기 이민사회 속에서 고된 일 보다도 사람에 지쳐 한없이 잠겼던 마음이라도 금방 풀어놓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근사하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도 한쪽으로 울창한 삼림이 병풍처럼 둘려 있어 산책길이 참 즐거워. 살면서 어디서나 울창한 나무들의 푸른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행복인지.

근데 오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 나무들이 어떤 때는 너무 많아도 걱정이라는 것을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지난해에는 바로 우리가 사는 옆 동네에 토네이도가 와서 나무들이 엄청 많이 쓰러져 피해를 본 집들이 많지. 한국 사람들도 몇 집 망가지고. 그런데 올해도 나무 때문에 수난을 겪었어.

한국엔 나무가 없어서 자연재해 피해가 더 커지는데 여긴 나무가 너무 크고 많아서 그 피해를 더하고 있으니 내가 처음에 한 말이 맞지?

어디나 사람 사는 일은 마찬가지라는 거.

지난 1월말쯤이었어.
생각지도 않은 Y2K를 맞은 게.
유비무환이라고 Y2K를 철저히 준비했던 사람들은 그 때 환한 방에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지.

날씨 춥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길래 겨우내 기다리던 눈이 오려나보다 잔뜩 기대를 했어. 지난 3년간 눈다운 눈이 한번도 안 왔거든.

그 날이 토요일, 유난히 눈이 그립던 차여서 블라인드를 수도 없이 들쳐보며 밤새 눈이 오려나 설레다 잠이 들었는데 그날 새벽 4시쯤 천둥 번개가 굉장해 잠을 깼지.

'눈은 커녕 또 토네이도가 부는 모양이네.'
잠결에도 실망하는 순간 전기가 나갔다는 것을 알았어.
아침에 다시 들어오겠지 하고 돌아누워 다시 잠을 청했는데 이게 웬걸?
이른 아침부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블라인드를 들춰보니 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사진을 찍고 난리가 난 거야.

밖을 자세히 보니까 그 많은 나무들이 얼음 속에 갇혀 있었어.
소나무 바늘잎 하나 하나가, 사철나무 잎 하나 하나가, 나무 가지 하나 하나가 투명한 얼음으로 두껍게 포장이 되어 있었어.

오라는 눈은 안 오고 비가 오다가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니까 그대로 얼어 버린 거야.
세상이 다.
있는 그대로.

얼음에 갇힌 나무들에게는 정말 안된 일이지만 기대했던 눈 구경에 대한 아쉬움이 달아날 정도로 눈이 번쩍 뜨였다.
책에서만 보던 동화 속 얼음 나라가 바로 여기였어.

그 광경이 얼마나 신비스럽고 아름답던지
"와- 우리도 나가서 사진 찍자"
탄성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지.

모두들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광경에 사진들을 찍고 산책을 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 상황이 그렇게 좋아할 것이 아니었어.
전기도 나가고 전화도 불통이었으니까.

처음엔 새벽에 몰아치던 천둥 번개 탓이려니 여느 때처럼 금방 다시 들어오겠지 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도로변에 있던 키 큰 나무들이 자기 나무에 얼어붙은 그 얼음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모두 쓰러져 버린 거야.

그 바람에 전기줄과 전화선이 피해를 입었고 그거 복구하는 며칠 동안 아틀란타 곳곳에서 많은 주민들이 깜깜한 세상을 보냈지.
아이들 학교 문닫은 것은 물론이고.

우리 집도 이틀 동안 영하의 추위에 떨었는데 하루는 Y2K 비상용으로 준비했던 가스 버너와 라면, 손전등, 촛불 등으로 견디고 이틀째는 이미 전기가 들어온 친구 집으로 피신을 갔었지.

가장 문명이 발달했다는 여기 미국에서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자연재해는 못 당한다는 것을 비롯해 참 여러가지를 배웠다 우리는.

"컴퓨터도 못 켜고 음악도 못 듣고 참 할 일이 없구나. 책이나 봐야지."
이건 희미한 촛불 옆에 바짝 붙어 책을 펴든 남편 말.

"촛불 다섯 개의 위력이 엄청나네."
이건 내 말.

그 춥고 깜깜했던 첫 밤, 촛불 다섯 개를 켜고 지샜거든. 전기 없을 때 밝은 것은 그렇다 치고 그게 그렇게 따뜻한지는 정말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Poor people들은 어떻게 살까?"
이건 미국 온 후로 옷장 속에 10년을 묵혔던 겨울 내복까지 꺼내 겹겹이 입고 열이 새나갈까봐 방안에서 문을 꼭꼭 닫아두고 가스 버너에 라면을 끓이고 있을 때 우리 딸이 한 말이다.

"Yahoo! We have a lot of fun!"
'기온 엄청 떨어진다는데 새벽을 견딜 수 있을까'
타는 부모속도 모르고 온 식구가 한방에서 바짝바짝 붙어 자면서 텐트라도 친 듯 좋아하는 우리 아들녀석 말.

나무 많은 곳에서 살면서 키 큰 나무들 줄줄이 쓰러졌던 날,
우리 집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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