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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 사무국이 차려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입구에는 언론의 총선보도를 삼행시로 비판한 회원들의 글이 붙어 있다. 대부분 비판적인 삼행시들 가운데 유독 두드러진 칭찬 글귀가 있다.

경향신문이 변하고 있다
향긋한 냄새가 난다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느껴진다
문제아 신문들이 이를 느끼려나...

불과 몇 년 전까지 '재벌신문' 으로 불리며 보수적인 논조를 띄어온 경향신문이 시민단체 회원들의 칭찬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향신문 2월 18일자 데스크 칼럼은 그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언론에 쫓기는 '시민의 힘'> 이라는 이 칼럼에서 필자인 김택근 편집부장은 보수언론들이 정치권의 '음모론' 에 합세해 시민단체들의 선거혁명을 좌절시키려 한다며 '동업자' 들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왜 언론은 시민단체에 적대적인가? 몇몇 언론은 아직도 기득권층을 대변하고 있는 특정 정당에 우호적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기득권을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역동적인 시민단체들은 왠지 맘에 들지 않는다. 시민단체들은 끊임없이 새 질서를 창출하며 사회변혁을 꿈꾸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 보수언론들은 변혁이 싫다. 그건 이른바 언론권력의 필사적인 방어이다. 시민단체를 통해 생성되는 여론에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보수언론에 대한 질타가 시민단체들의 성토 수준이다. 총선연대 언론모니터팀장 김시창 씨(34)는 이 글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로 '감동적' 이라고 표현했다. 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경향신문이 이런 글을 실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 이라는 것이다. 언론의 '음모론' 에 시달리고 있는 총선연대 활동가들의 심정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칼럼이 시민단체들에 대한 경향신문의 일회적인 '인기성 발언' 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향신문은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시작된 이래 꾸준히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1월 25일에는 <경향 '총선보도준칙' 마련> 이라는 社告를 내보내고 시민단체와 함께 선거혁명을 추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날부터 2월 10일까지의 신문보도를 분석한 선거보도감시연대회는 보고서를 통해 "(시민단체 낙천낙선운동에) 진정으로 우호적인 신문은 한겨레, 대한매일, 경향신문" 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의 이 같은 변모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소유구조 개혁' 이라는 개혁과 진통이 있었다는 뜻이다.

변화의 단초는 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향신문은 6천억 원이 넘는 부채가 회사의 자산가치를 넘어서는 극도의 경영위기를 맞고 있었다. 경향의 부채 규모는 10대 주요 중앙일간지 가운데 최악이었다. 당시 경향신문 주식의 98.98% 를 소유하고 있던 한화그룹은 경향신문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중을 비추었고, 98년 IMF를 맞아 강제된 재벌 구조조정 과정에서 마침내 경향신문을 그룹에서 분리시켰다.

이 때 일각에서는 한화의 경향신문 분리 선언이 구조조정의 면피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극도로 열악한 재무구조에서 '독립경영' 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비관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2년여가 지난 현재 경향신문의 '홀로서기' 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경향신문 배병문 노조위원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한다. "절반에 가까운 사원들이 경향신문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자립경영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사원주주제' 를 도입했다. 퇴직금을 털어 76억을 모금하고 임금을 대폭 삭감해 경향살리기에 나서야 했다. 솔직히 당시에는 '독립언론의 의지' 보다는 생존의 문제가 더 절실했다."

그러나 '생존의 요구' 에 따른 소유구조의 변화는 다른 변화들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오는 25일 경향신문은 한겨레신문 이후 최초로 편집국장을 직선으로 뽑는 선거를 치른다. 배 위원장은 편집국장 직선제라는 획기적인 전환을 이렇게 설명한다.
"경영 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독립언론으로서 편집의 방향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최소한 빅3로 불리는 조선, 중앙, 동아 편집방향을 쫓아가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과정에서 편집국장 직선제가 제기됐고 총선을 맞아 시민단체들의 정치개혁에 동참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경향신문의 변화는 편집국 쇄신에 그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신문사 노조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제작국 사원들도 적극적인 활동에 나선 것이다. 지난 19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교육관에서는 언론노련이 주관한 노동법 강좌가 마련되었다. 이날 교육에는 30여 명의 경향신문 제작국 직원들이 참여해 노동법과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사원 모두가 주인인 '사원주주제' 에서 오히려 노조활동이 활성화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배 위원장은 "그동안 신문사 노조가 제역할을 못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 등 다양한 요구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노조가 비로소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고 말한다.
경영악화라는 강제적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소유구조의 변화' 는 경향신문에 여러 가지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들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유구조의 개혁을 통한 신문개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많은 시민단체들과 언론운동단체들이 경향신문의 변화를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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