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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러닝메이트 부통령 후보 J. D. 밴스는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힐빌리의 노래>로 스타가 되었다.

그 책은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 벨트와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그렸지만, '누구는 빈곤이라는 역경을 딛고 올라서는 왜 누구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은연중에 또는 공공연하게 의지와 가족애, 정상적 시민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서사는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보수적인 가족/시민 관념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밴스의 최근 행보를 보면, 그의 책이 미국 노동자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를 돌아보게 하면서도 한계가 있었다는 생각이 다시 들기도 한다.

여성들이 겪는 빈곤의 모습

그와 대비되는 책이 이번에 다룰 <하틀랜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차이점은 여성들이 서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농민이거나 그보다 더 불안정한 일종의 프레카리아트다. 캔자스 출신인 저자 세라 스마시는 자신과 자신의 할머니들, 이모들, 어머니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빈곤의 모습을 그려 나간다.

빈곤은 배를 곯는 것을 넘어, 가난한 사람들을 각종 폭력과 부조리로 내몬다. 그녀들은 10대 때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고,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하며, 결혼 후 가정 폭력에 일상적으로 시달린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 남편들 또한 제대로 된 안정적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불안정을 견디기 힘들고 더 나은 문화적 환경을 만나기 어려운 조건에서, 남편들은 쉽게 술과 약물 중독 등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어렵고 남편 없이 살아가기에 힘든 제도적 여건과 주변 분위기 탓에, 남편의 가정 폭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자신과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도망친다. 수없이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가는 곳마다 생계를 영위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혼 과정에서 자녀의 양육권을 지키지 못하기도 한다.

 미국 중서부의 가난한 여성들이 서로의 삶을 지탱하고 보듬는 관계를 포착한 하틀랜드.
미국 중서부의 가난한 여성들이 서로의 삶을 지탱하고 보듬는 관계를 포착한 하틀랜드. ⓒ 반비 출판사

빈곤, 실질적 자유가 박탈당한 상태

빈곤이란 무엇일까.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르마티아 센은 역량의 관점에서 그 질문에 답한다.

그가 제기한 '역량 접근(capability approach)'이라는 관점은 빈곤을 역량의 박탈, 즉 "사람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서 한 개인이 행동할 수 있는 실질적 자유(substantial freedoms)가 박탈당한 상태로 정의한다.

빈곤은 단지 수량적 기준인 소득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 <하틀랜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처한 삶의 굴레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희망을 꿈꿀 기회와 힘을 박탈당한다. 폭력적인 남자들로부터 도망쳐 생활비를 버느라 정신없이 살면서 끝없이 이사 다니고, 그 와중에 자신들이 도움이 되는 정책에 대해선 정보를 접하기 어려우며, 간혹 필요한 지원을 찾아내도 그녀들의 떠도는 삶은 지원받을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그녀들 모두 이번에는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내일의 희망은 어제의 비참함으로 자주 끝났다. 수없이 나열된 거주지만큼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런 다짐이 차츰 약해지기도 했을 테다. 항상 떠날 채비를 하는 이들, 달리 갈 집이 없는 이들이 처한 빈곤의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스마시는 가난한 여성들의 삶을 좌우하는 제도적 환경이 나쁜 방향으로 변화해 온 역사를 지적한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실패하지 않도록 도움을 줄 제도적 환경이 없었다.

그나마 자신이 엄마, 이모들보다 더 많이 교육받고 다른 삶의 지평을 열 수 있게 된 데는 빈곤을 둘러싼 제도적 환경이 준 기회가 중요했다고 강조한다. 이런 시각은 가난의 면면을, 여성들의 삶을 단편적으로 바라보지 않게 돕는다.

모자라고 둔탁하지만, 서로를 챙기고 지키는

<힐빌리의 노래>에서처럼 저자 본인 또한 빈곤을 벗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로 나름 성공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런 성장 이야기는 항상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야기 사이에 끼어드는 형식으로 흩어져 있다. 이런 구성은 여성들이 어떻게 빈곤한 삶을 견디고 꾸려왔는지를 충실히 다루며, 불안정 속에서도 어떻게든 서로를 보살피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물론 스마시에게도 중요한 변화의 계기는 가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중에서도 집안 여성들의 돌봄이다. 하지만 흔히 얘기하는 전형적인 가족애로 보긴 힘들다. 그들은 극도로 어려운 사정 탓에 제대로 된 보살필 수 있는 여건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어려웠고, 때론 방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마시는 자신을 길러준 여성들의 이야기를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자신의 환경이 부족했다고 탓하기보다는 길러준 이들의 사정을 고려한다. 그런 저자의 애정 어린 시선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단지 이제는 성공했기 때문인 걸까.

책 속 여성들은 어렵게 여러 거처를 옮겨 다니지만, 그곳에 찾아온 또 다른 여성들을 쉬이 내치지 않는다. 그러다 또 폭력과 빈곤을 견디지 못해 떠나더라도 억지로 붙잡지도 않는다. 모인 그때만큼은 서로 뒤얽혀 지낸다. 그걸 뭐라 불러야 할까.

서로 다투고 미워하는 와중에도 곁을 떠나지 않고, 좀 모자라고 둔탁하지만 각자 할 수 있는 식으로 서로를 챙기고 지키는 것. 차마 끊어내기 힘든 '정'과 같은 것이라고 불러야 할까. 자기와 같은 빈곤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동질감, 동병상련 그런 걸까.

그것만큼 고루하고 질겁할 만한 게 없는데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삶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에 더해, 할머니들과 엄마가 만났던 숱한 못난 남자들과는 조금은 다른 남자들의 지지와 학교 선생님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도움도 있었다.

<하틀랜드>는 미국 중서부의 가난한 여성들이 처한 삶의 현실을 세밀하게 그려내면서, 그들 속에서 빈곤의 굴레를 견디고 나아가 떨쳐낼 수 있는 여러 계기를 포착한다. 개인에 맞서 사회적 보호, 제도적 해결책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는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를 지탱하고 보듬는 관계다.

<하틀랜드>는 가난과 폭력 속에서도 근근이, 면면히 이어지는 어쩔 수 없는 돌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10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박기형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


하틀랜드 -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쫄딱 망하는 삶에 관하여

세라 스마시 (지은이), 홍한별 (옮긴이), 반비(2020)


#하틀랜드#미국#여성#빈곤#레드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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