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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저녁, <소년이 온다>의 저자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마침내 한국에서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탄생한 것이다. 백인 남성이 아닌 아시아 여성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가 돌아간 것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강은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121명 중 18번째 여성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BTS(방탄소년단), 블랙핑크,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에 이어 대한민국의 문화예술 역량을 보여준 또 하나의 쾌거라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론의 대서특필은 당연했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사회관계망서비스)가 수상 소식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였다.

수많은 찬사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윤석열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였다. 대통령은 10일 저녁 페이스북에 "한강 작가님의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대한민국 문학사상 위대한 업적이자 온 국민이 기뻐할 국가적 경사"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작가님께서는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키셨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앞으로도 훌륭한 작품으로 전 세계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시길 바랍니다"라는 마지막 문구가 눈에 밟혔다. 오해이거나 삐딱한 시선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대통령이 노벨문학상을 탄 한국의 작가에게 "전 세계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고 쓴 것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왜 그럴까. 3년 전 기억 때문인 것 같다.

대통령의 노벨문학상 수상 축하 메시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남긴 윤 대통령의 10일 페이스북 게시글 캡처
대통령의 노벨문학상 수상 축하 메시지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남긴 윤 대통령의 10일 페이스북 게시글 캡처 ⓒ 윤석열 대통령

인문학은 돈 못 버는 학문?

당시 국민의힘 대선주자였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2021년 9월 13일 국립안동대를 찾아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인문학이라는 건 공학이나 자연과학 분야를 공부하며 병행해도 되는 것"이라며 "(인문학은) 많은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 그건 소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가 비판에 직면한 바 있다(관련기사: 윤석열의 인문학 발언, '쩍벌' 보다 놀랍다 https://omn.kr/1vd7g).

이와 관련하여, 당시 유승민 전 의원은 "사시 합격을 위해 9수를 하는 것은 괜찮고, 인문학은 대학·대학원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느냐"며 비판했고,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은 <신동아>에 '인문학을 부수적 학문 취급하는 윤석열에게 告함!'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인문학을 '돈 못 버는 쓸모없는 학문'으로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위험천만하다"고 쓴소리를 했다. '인문학 무용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인문학 홀대론'으로 비치는 대통령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2021년 9월 13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가 안동대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21년 9월 13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가 안동대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안동대학교방송국AUBS 제공

'통합형 수능'으로 문과 몰락 가속화

물론, 한국의 인문학 몰락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윤석열 대통령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 이전 정부도 말로는 인문학의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국가 경쟁력은 과학기술에 있다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문·이과 통합형 수능으로 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본래 취지는 사라지고 문과의 몰락만 초래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2021년에 처음 도입된 통합형 수능(2022학년도 수능)은 '수학' 점수에 따라 진로가 결정되는 의도치 않은 폐해를 가져왔다. 이과의 '문과 침공'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부작용은 심각했다. 공식적으로는 고교에 문·이과 구분이 없지만, 수능 선택과목에 따라 사실상 문과와 이과가 나뉜다. 수학을 예로 들면, 문과 학생들은 <확률과통계>를 선택하고, 이과 학생들은 <미적분>이나 <기하>에 응시한다.

2022년 12월 서울중등진학지도연구회가 서울 시내 고등학교 87곳의 수험생 2만 6천여 명의 수능 실채점 결과를 분석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23학년도 수능에서 수학 영역과 국어 영역 최상위권의 '이과 쏠림' 현상은 극심했다. 수학 1등급의 93%가 이과 학생이었고, 국어 1등급을 받은 학생 가운데 선택과목으로 <언어와매체>를 본 학생이 85%를 넘었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 자율형사립고 3학년 12학급 중 '문과 수학'으로 여겨지는 <확률과통계>를 가르치는 학급은 딱 하나라는 사실은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다.

돈 안 되는 학문은 쓸모가 없다는 잘못된 인식과 그에 따른 국가 교육정책은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문과의 대몰락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전의 한 일반고 고3 담임교사는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날이 갈수록 문·이과 학력 격차가 커지고 있다. 수학뿐만 아니라 국어와 영어 교과도 문과반과 이과반의 학급 평균이 20점 이상 난다"고 말했다. "문과 최상위 학생 중 일부가 입시에 유리한 미적분을 선택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인문학 되살릴 대안 고민해야

인문학은 말 그대로 '몰락 위기'에 내몰렸다. 깊어지는 '인문학 위기'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부터 인문학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등을 연구하는 인문학(人文學)을 홀대하면 모든 학문의 토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필요하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죽어가는 인문학을 되살릴 대안 모색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강#노벨문학상#인문학위기#윤석열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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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맘껏 놀고, 즐겁게 공부하며, 대학에 안 가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상식적인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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