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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밤에 뜬 달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면 숙연해질 때가 있다. 한낮의 생동감 넘치는 태양 아래 바쁘게 살다가 어스름한 저녁 처연히 뜬 달을 보며 그제야 내 안의 소리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랄까?

그런 달을 소재로 한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 <달 샤베트>.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달에 대한 감수성 가득한 그림책이거니 넘겨짚었다. 하지만 책 장을 펼치는 순간 그런 예상이 가뿐히 비껴갔다.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한 방이 있다.

이 책은 읽는 사람마다 느끼는 시사점이 다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어디에 초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환경문제를, 어떤 이는 이웃 간의 정을, 또 다른 이는 달에 관한 추억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달샤베트 그림책이 공연으로 나왔다. 아들과 함께 간 사진
달샤베트 그림책이 공연으로 나왔다. 아들과 함께 간 사진 ⓒ 이유미

이 책을 보며 주인공 아파트 반장 늑대 할머니의 넉넉한 인심에 큰 감화를 받았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요즘의 사회. 닭장 같은 아파트에 살며 누가 이사 오는지도,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심지어 엘리베이터에 타는 사람들도 늘 낯설다. 이런 풍경이 당연한 현실에 살고 있기에 어쩌면 반장 할머니의 행동이 더 크게 감동으로 다가왔는지 모른다.

책은 우리처럼 한여름 무더위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아파트 사람들의 모습이 주 배경이다. 더위를 식히려 에어컨과 선풍기를 하릴없이 틀어대다 전기사용이 허용치를 넘어버려 밝디밝던 아파트 일대는 일순 깜깜한 암흑세계로 변했다. 그때 반장 할머니가 기지를 발휘해서 아파트 사람들을 하나로 모은다.

그 기지란 바로 흘러내리는 달 방울을 모아 얼린 시원한 달 샤베트를 나누어주며 잠시나마 더위를 이길 수 있도록 한 것. 다소 판타지 같은 설정이지만 무더위에 달마저 흘러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은 납득이 갔다. 우리가 얼마 전까지 겪은 혹독한 한여름 더위를 생각하면 말이다.

더운 날씨 탓에 서로가 얼굴 붉히며 싸우고 소통도 없어진 이웃들. 그러다 정전이라는 공통의 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상황은 급 반전된다. 반장 할머니의 달 샤베트를 먹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길. 함께 손을 잡고 길을 밝히며 어둠을 헤쳐 나가는 장면에 잠시 마음이 얼얼해졌다. 코로나 시기 흩어져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봉사하고 서로 조심했던 장면이 잠시 겹쳐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 빛이 난 장면은 바로 반장 할머니의 인심. 정전이 언제 끝날지도 모를 극한의 상황 속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던 그 장면. 이웃들이 그 달 샤베트를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한데 모여 서로 웃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는 그 지혜롭고 어진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내 유년 시절 이웃들은 대부분 반장 할머니와 같았다. 초등학생이던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심부름은 엄마 음식을 이웃집에 배달하는 것이었다. 엄마의 주특기인 새콤한 비빔국수는 2층짜리 주택이 여러동 모여 살던 시골 동네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손이 큰 엄마는 세 남매가 먹고도 남을 넉넉한 양을 해서 옆집 윗집 심지어 다음 동의 친구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친구 집에 배달할 때면 유독 신나서 나가곤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렇게 돌아오는 내 손엔 친구집 엄마의 주특기인 음식들이 들려있곤 했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응답하라 1988>에 그런 장면이 나오는 데 꽤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그뿐이랴. 엄마가 어쩌다 볼일이 있어 나가실 땐, "00아 누구 집에 가 있어, 엄마 금방 올게"라는 말이 떨어지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여러 집을 전전하며 그곳에서 간식을 먹으며 평온하게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그건 우리 집도 매한가지였다. 친구들 엄마가 늦는 날엔 친구들과 우리 집에서 엄마가 해 준 프렌치토스트 같은 간식을 먹으며 달달한 하루를 보내곤 했으니 말이다.

서로 부대끼며 서로의 집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까지도 알고 지내던 따스한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어쩐지 마음속에 따뜻한 달이 가득 들어차 앉은 느낌이 든다. 그 안온한 시절을 살아오며 이웃 간의 사랑과 서로의 베품덕에 내 품속에 따뜻하고 꽉 찬 달하나를 여태껏 안고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보낸 유년 시절 내 몸속 어딘가 아로새겨진 나눔의 지혜 때문인지 나도 늘 여행지에서 특산품을 사게 되면 동네언니를 불러 나눠주고, 아이들 소풍도시락 쌀 때 김밥을 넉넉히 싸서 학교 동료 선생님들에게 내놓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봐서인지 아들도 꼭 젤리나 사탕 같은 것이 생기면 친구나 학원 선생님들 준다며 여유분을 더 챙기곤 한다. 아이의 귀여운 행동을 보며 이것이 바로 대를 이어 내려오는 나눔의 지혜인가 싶어 살짝 웃음도 났다.

달 샤베트 책을 보며 잊고 있던 어린 시절 이웃들의 행동, 그리고 요즘 우리의 현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먹고살기 바빠 누군가의 삶에 눈길을 주기도 어려운 사회 속 어쩌면 반장 할머니 같은 행동이 성가시다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어린 시절 알게 모르게 마음에 스민 이웃의 정다운 행동들이 지금의 나에게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은은히 살아남아 내가 대를 이어가는 걸 보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성가신 행동이다.

<달 샤베트> 마지막 부분에선 사라진 달이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으로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책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았지만 달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반장 할머니가 이웃들에게 달 샤베트를 나누어준 그 따뜻한 행동이 모여서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를 도와본 사람, 누군가에게 자신이 자신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줘 본 사람은 안다. 많은 사람에게 달 샤베트를 나누어주는 행동은 돌고 돌아 자신의 마음에 더 큰 달을 뜨게 만들어주는 행복한 행위라는 것을 말이다.

내면소통의 저자 김주환 작가님이 한 유튜브 영상에서 지속가능한 행복을 느끼는 방법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행복은 일회성의 강렬한 자극이 아닌 은은하고 지속가능한 행복. 그것을 느끼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베푸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아마도 훨씬도 전에 그림책 반장 할머니, 유년시절 우리의 이웃들,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우리 엄마는 나눔이 주는 행복을 익히 알고 실행했던 것이리라.

<달 샤베트>를 접하고 나서부터 나는 어스름한 밤에 달을 보며 드는 행위가 하나 추가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내 안의 소리를 듣는 것에 하나 더해 "내일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볼까?"라는 생각 말이다.

선선한 가을 밤 환히 뜬 달을 보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그러면서 속으로 되뇌인다. 독박육아로 힘들었다는 친구에게 사랑 가득 담은 따뜻한 위로와 커피 기프티콘을 보내야지, 엄마에게는 얼마 전 농사지어 보내온 고구마를 맛있게 먹고 있는 사진과 노고에 감사하는 문자를 보내야지라고. 그런 생각만으로도 벌써 마음에 달이 꽉 들어찬 느낌이다.

매일 밤 하늘에 뜬 달을 보며 그 달을 먼저 내 마음속에 들이고, 달에서 떨어진 달방울로 만든 노오란 달 샤베트를 매일 하나씩 누군가에게 나누어주어야지. 사랑을 가득 담아 그 각별한 마음이 누군가에게 온전히 전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진심을 담아 내가 나누어 준 달 샤베트들은 하나둘씩 모여 내 마음에 다시 둥근 달을 만들어 줄 것을 알기에.

 달샤베트
달샤베트 ⓒ 이유미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게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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