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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도 지사(왼쪽)와 손석봉 지사
김형도 지사(왼쪽)와 손석봉 지사 ⓒ 국가보훈부

김형도(金炯燾) 지사는 1948년 10월 4일 세상을 떠났다. 1880년 8월 22일 태어났으니 향년 68세였다. 경북 예천 보문면 오신리 409번지가 본적인 그는 27세이던 1907년 경북 문경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진에 들어 일본군과 싸웠다.

1908년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한 뒤 은둔하다가 1915년부터 김주상 등 동지들과 함께 문경과 충북 단양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쳤다. 5월 8일 문경 호계면 구상리 김중배로부터 10여 원을 받았고, 5월 24일에는 김진갑 등 동지들을 더 조직했다.

그후 단양군 대흥면 범산리 이휘수로부터 옷감과 비녀 등을, 단양군 금강면 용부원리 이범구로부터 군자금을 거두었다. 이때 이들은 각자 곤봉 등 도구를 갖추고 대상을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체포되어 1915년 6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강도 혐의로 징역 10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강년 의진에 들어 일본군과 싸운 김형도 지사

손석봉(孫石鳳) 지사는 1965년 10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경북 경주 황오동 117번지가 본적으로, 1901년 11월 29일 출생했으니 향년 64세였다. 1919년 당시 대구 계성학교 학생으로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8일 일어난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영남지역 3ㆍ1운동의 효시일 뿐 아니라 이후의 영남지역 시위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이날의 대구 시위는 33인 중 1인인 이갑성(계성학교 졸업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남산정교회 목사 이만집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만집은 남산정교회 조사(집사) 김태련,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 등과 함께 논의한 끝에 3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3월 8일은 평양, 강경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인 서문시장 장날이었다. 시장이 계성학교에서 가까워 만세 운동 준비물을 들키지 않고 운반하는 데 안성맞춤이고, 장날이라 자연스레 군중이 운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대표로 대구만세운동에 참가한 손석봉 지사

손석봉은 계성학교 4학년으로서 학생대표로 거사에 참여했다. 손석봉 등은 기숙사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윽고 3월 8일 사전에 조직된 기독교인들과,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성경학교 학생들이 서문시장으로 모여들었다.

대구고보(현 경북고) 학생들도 계성 측의 연락을 받고 백기만, 허범, 신현욱 등이 이상화의 집에 모여 계획을 세운 다음, 당일 서문시장으로 달려가 동참했다. 학생들은 일제에 들키지 않기 위해 선교사 주택 단지 일대의 '3·1운동길 90계단'을 올라 동산을 거쳐 지금의 오토바이 골목 일대인 서문시장으로 갔다.

이만집, 김태련 등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학생, 시민, 장꾼 등의 호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일본군 기마대와 경찰의 제지를 뚫고 1000여 군중은 서문로를 걸어 경상감영까지 갔다.

시위대는 거기서 우회전해 종로를 지나 달성군청(현재의 대구백화점) 앞까지 행진했다. 이윽고 대구 주둔 일본군 80연대가 출동해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결국 시위대는 해산당했고, 손석봉은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3월 10일, 26일, 30일, 4월 15일... 계속된 만세 시위

이틀 뒤인 3월 10일, 서문시장 시위 때 체포되지 않은 시민과 학생들이 남문외시장(염매시장 일원)에서 만세시위를 재현했다. 3월 26일에는 군위군 의흥 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30일 동화사 지방학림(승가대학) 학생들이 덕산정시장에서 3천여 군중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4월 15일 강윤옥과 장용암 등이 대명동 공동묘지에서, 4월 26일과 28일 동구 미대동 주민들이 연속으로 여봉산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투쟁했다. 전국적으로 계속된 만세운동 과정에서 우리 겨레는 "7천여 명이 죽고, 1만6천여 명이 부상당하고, 4만7천 명이 투옥되었다(국가보훈부,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

"3ㆍ1운동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수만 명의 목숨과 피와 눈물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중략) 오늘의 대한민국은 바로 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나라이며 3ㆍ1정신을 이어받아 성립된 정통 정부인 것이다. (중략)

3ㆍ1운동이 낳은 또 하나의 아들은 독립군이다. (중략) 3ㆍ1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8ㆍ15광복의 날이 올 때까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빛나는 역사를 가질 수 있었다(<알기 쉬운 독립운동사>)."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김형도#손석봉#임시정부#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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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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