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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 책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윤후명 작가의 교정 흔적 윤후명(1946년~)과 같은 저명한 작가도 교정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틀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서울 송파 책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윤후명 작가의 교정 흔적윤후명(1946년~)과 같은 저명한 작가도 교정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틀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 박정은

나는 음악을 들으면 관련한 서사가 마구 떠오른다.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듣곤 하지만, 아무래도 발라드, 특히 이별을 노래하는 발라드를 들을 때면 그 분위기에 취해 끝없이 상상의 길을 펼쳐가게 된다. 주로 설거지를 할 때, 청소를 할 때, 빨래를 널 때.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음악을 듣는 편이다.

이 그릇을 다 헹구고 나면 어서 키보드를 두드려야지. 청소를 끝내고 나면, 빨래를 다 널고 나면, 내가 상상해 낸 그 세계로 넘어가서 머릿속에 있는 스토리를 뽑아내야지. 그런 생각에 신이 난다.

하지만 머릿속에 꽉 찼던 스토리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작업에, 방해되는 요소가 생겼다. 바로 한글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글자 아래 '빨간 밑줄'이다.

문서 작성 중 맞춤법이나 문법 오류를 자동으로 감지하여 표시하는 기능이다. 웹소설을 처음 쓸 때는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름 맞춤법에 자신이 있었고, 오히려 기계가 나의 표현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줄을 긋는 거라고 여겼다. 기계는 기계이니 오류는 분명 존재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빨간 밑줄은 내 눈에 거의 띄지 않았고, 스토리를 전개해 나감에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웹소설 e북 출간 준비를 할 때, 상황은 달라졌다. 드디어 나도 출간 작가가 된다는 기쁨은 잠시, 완결된 나의 이야기가 교정자를 거쳐 돌아왔을 때 내가 느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에 온통 빨간 줄, 파란 줄 투성이였다. 맞춤법이 어긋났거나, 표현이 어색하거나, 내용에 오류가 있는 경우 등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한 페이지에 거의 절반을 넘겼다.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놀란 나에게 처음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 정도면 출간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교정자의 안내대로 글을 다시 수정하면서, 높지도 않았던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맞춤법에 대한 한글 자신감은 어디 내놓을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에게 미안하지도 않느냐는 내면의 소리가 들렸고, 언젠가 방영했던 '우리말 겨루기'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우승할 자신이 있다던 과거 나의 발언을 삭제하고 싶었다.

교정자의 빨갛고 파란 안내를 따라 수정 작업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 수정하고 보니, 나의 글이 더욱 근사해진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가독성을 높여 독자들의 불편함을 줄인다는 점에서, 참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나의 강박이 되었다는 것이다. 떠오르는 서사가 있을 때 막힘없이 술술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빨간 밑줄이 드러나면 도통 글이 나아가지 못한다. 마음의 소리는 이렇다.

'너 틀렸어. 너의 이런 글을 보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겠어? 네 글의 스토리가 어떻든간에 단말기를 꺼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가버리지 않겠니? 힐링 되는 글 쓰고 싶다며? 이래서야 힐링이 되겠어? 고작 이딴 글을 읽기 위해 시간을 투자했다니, 시간이 아깝다 아까워. 그러면 어쩌려고 그래?'

마음의 소리가 너무 커서 나의 손가락은 자판 위가 아닌 마우스를 향하게 된다. 맞춤법 검사기를 켜고 빨간 밑줄이 그어진 문장이나 단어를 '복붙'해서 검사한다. 맞춤법 검사기가 워낙 신통해서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표현까지 제안해 준다. 검사기의 도움으로 빨간 밑줄을 탈출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다.

빨간 밑줄에 발목 잡혀 수정을 반복하고, 결국 맞춤법 검사기에 다녀오고 나면 머릿속에 있던 서사는 3분의 1이 날아가고 없다. 처음에 가졌던 그 감정은 반으로 줄어있다. 마구 달려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달리지 못한다. 달릴 말이 사라졌으니까.

나의 이러한 강박은 불행하게도 다른 이의 글을 읽을 때도 작동한다. 충분히 공감되고, 감동이 있는 글이지만 맞춤법이 맞지 않는 부분들 때문에 마음의 문이 닫히는 경우가 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이 정도 맞춤법도 모르냐'는 비난이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어린 시절, 피아노를 친다고 하는 사람의 손톱이 긴 것을 보며 못마땅하게 고개를 내젓던 깐깐한 선생님의 모습이 빙의된 것처럼. 정작 나에게 처음 출간 제안을 해준 출판사는 형편없는 맞춤법이 넘쳐 대는 나의 글을 인정해주었는데도 말이다.

"빨간 줄을 없애면 되잖아."

내 고민을 알고 있는 누군가 조언해 주었다. 국어 시험도 아닌데 빨간 줄 때문에 손해를 보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인터넷 상에는 한글 프로그램의 맞춤법 도우미인 빨간 줄을 없애는 방법에 대해 친절하고도 자세한 안내가 많이 올라와 있다.

그런데 또 이 방법을 알고 나니, 빨간 줄을 없애고 싶은 마음과 또 그것을 쉽게 없애지 못하는 마음이 내 안에 공존한다. 행여 틀린 줄도 모르고 놓쳐 버릴 나의 오류가 불안해서다.

나는 결단해야 할 것이다. 나의 틀림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틀림을 끌어안을 용기도 필요하다. 빨간 줄을 과감히 없애고 좀 더 자유롭게 자판을 두드릴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차후 기자의 개인 페이스북에도 실립니다.


#웹소설#맞춤법#강박#틀려도괜찮아#자유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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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평범한 주부. 7권의 웹소설 e북 출간 경력 있음. 현재 '쓰고뱉다'라는 글쓰기 공동체에서 '쓰니신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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