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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문화를 나눈다.[기자말]
멕시코시티의 점심시간이 시작될 무렵 숙소앞 도로 한편에 물건을 정리하고 앉았다. 과연 손님이 올까, 싶은 마음으로...
 멕시코시티의 점심시간이 시작될 무렵 숙소앞 도로 한편에 물건을 정리하고 앉았다. 과연 손님이 올까, 싶은 마음으로...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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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떠날 준비는 가방을 싸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일로 시작한다.

2023년 9월 6일 LA에서 멕시코 시티로 입국해 그곳에서 40일을 지내는 동안 우리는 멕시코에 반해버렸다. 그리고 멕시코를 떠나는 대신 멕시코 여행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나라의 제일 북서부 티후아나(Tijuana)로 가기로 했다.

숙소를 떠나기 하루 전날 40일간의 체류에서 늘어나거나 불필요해진 것을 정리해 호텔 앞 길거리에서 "여행자의 배낭을 비웁니다"라는 이름으로 벼룩시장을 열었다.
      
가격표는 '무료, 5페소(400원), 10페소(800원)' 3가지로 통일했다. 30분 만에 2/3가 새 주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호텔 메이드에게 선물로 주었다.  
 
물건을 가려내고 가격표를 붙이는 작업을 숙소방에서 미리 준비했다.
 물건을 가려내고 가격표를 붙이는 작업을 숙소방에서 미리 준비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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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점심 먹으러 나온 숙녀가, 다음은 업무차 나온 부부가, 다음은 직장인 청년이... 이렇게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하나둘씩 골라갔다.
 처음에는 점심 먹으러 나온 숙녀가, 다음은 업무차 나온 부부가, 다음은 직장인 청년이... 이렇게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하나둘씩 골라갔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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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이 흘러 멕시코 입국 301일 째(약 10개 월), 라파스 도착 205일, 라파스 정주 183일을 맞았다. 이 반도와 멕시코 본토를 연결하는 바하페리(Baja Ferries)에 오르기 나흘을 앞두고 우리는 배낭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1개월 내로 사용하지 않을 것들을 골라내었다. 그동안 우리를  지켜주었던, 그리고 우리의 편리를 도모해 주었던 것들이지만 지금 사용이 급하지 않은 것들을 분리했다. 이 중에는 우리가 길 위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이 준 선물들도 있었다.

이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었으므로 '박절하게' 들어내기란 어려웠지만, 그것을 감수했다. 그리고 그 선물이 당장 쓰임이 필요한 사람에게로 가서 그 기능을 이어가는 것이 선물을 준 이의 마음을 더 잘 이어가는 것이라는 면피의 이유를 찾았다.

그렇게 우리의 배낭을 떠나는 물건 30여 점이 어떤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할까, 생각했다. 내 얘길 듣고는 아내가 말한다.

"부족함이 없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애옥한 여행자의 배낭 속 물건이 왜 필요하겠어요? 이것들이 필요한 사람들은 우리가 살았던 변두리 마을 사람들일 거예요."

아내의 말에 동의했다. 다음날 아침 7시, 그 물건을 자전거에 싣고 라린코나다(La Rinconada)의 공설시장으로 갔다. 관광객이 방문하는 시장이 아니라, 가난한 동네의 이 시장이 가장 붐비는 시간은 이른 아침이기 때문이다.

이 물건이 꼭 필요한 이에게 가서 쓰이기를 
 
숙소에서 3km쯤 떨어진 가난한 동네의 공설시장으로 자전거를 타고가서 아침일찍 자리를 폈다.
 숙소에서 3km쯤 떨어진 가난한 동네의 공설시장으로 자전거를 타고가서 아침일찍 자리를 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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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다 정리가 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발길을 멈췄다. 가격표는 1페소(80원)와 5페소(400원) 두 가지로 통일했다. 대신 멕시코시티에서의 벼룩시장에서와 달리 무료와 10페소 가격을 없앴다.
 미처 다 정리가 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발길을 멈췄다. 가격표는 1페소(80원)와 5페소(400원) 두 가지로 통일했다. 대신 멕시코시티에서의 벼룩시장에서와 달리 무료와 10페소 가격을 없앴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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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입구에 요가 매트를 펴고 물건들을 펴기 시작했다. 미처 정리가 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었다. 가격표는 1페소(80원)와 5페소(400원) 두 가지로 통일했다.

대신 멕시코시티에서의 벼룩시장과는 달리 무료와 10페소 가격을 없앴다. 가격표를 본 몇몇 사람들이 물었다. "이것은 페소가 아니라 달러인가요?" 그 물음에는 좀 길게 설명했다. 

"페소가 맞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하는 배낭여행자입니다. 배낭 속 물건 중에 당장 필요치 않은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이 '벼룩시장'을 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격표를 붙인 이유는, 이 물건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가서 다시 쓰임이 이어지길 원해서입니다. 무료라면 이 물건들에게 좀 미안할 것 같아서요." 

설명을 듣고서야 사람들은 이 합리적이지 않은 가격에 '아하!' 표정을 지었다.

야자수잎 모자(sombrero de palma)는 얼굴이 짙게 그을린 남자가, 리본 장식의 여성용 모자는 뽀얀 피부의 한 남성이, 아들에게서 물려받았던 자라 남성 재킷은 멋쟁이 할아버지가, 나의 치통과 잇몸 부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샀던 약초는 등이 굽은 할머니가 가져갔다. 컵 두 개 중 하나를 함께 사용하기로 하고 내놓은 나머지 핸드메이드 황동컵은 중년 아저씨의 차지가 되었다. 30분 만에 우리가 명명한 '손바닥 벼룩시장'은 끝이 났다. 

우리가 벽에 '메르카도 데 풀가스(Mercado de pulgas 벼룩시장)'라고 써 붙인 종이를 떼는 것을 본 한 아저씨가 말했다. 

"그 말은 미국인의 용어이고, 우리는 '티앙기스(Tiangui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멕시코시티의 '국립 인류학 박물관'에 재현 전시된, 아즈텍 제국 시대의 거리시장
 멕시코시티의 '국립 인류학 박물관'에 재현 전시된, 아즈텍 제국 시대의 거리시장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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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anguis'는 오늘날의 '임시 거리 시장'을 의미하는 아즈텍 제국의 언어인 나와틀어 'Tianquiztli'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나중에 알았다. 

이 용어를 알려준 이는 우리에게 "우리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어요. 누구나 뿌리를 잊는 것은 슬픈 일이잖아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 손바닥 벼룩시장은 70페소, 대략 한화 5400원 쯤의 현금수입과 더불어 문화적 인식과 태도를 우리에게 깨우쳐주었다. 

남은 몇 점과 그를 위해 챙겨두었던 만능 쇠자와 함께 지역 아동과 청년들에게 MTB 라이딩 기술을 전수하는 봉사를 하고 있는 자전거 수리점, 세르히오(Sergio)와 마릴루(Marilu) 부부에게 전했다. 부부는 이것을 무료로 받아도 되냐며 오히려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답했다.

"그럼요! 충분히 무료로 받을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물건에도 '시절인연'이 있다.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이들을 떠나보냈다. 이로써 우리의 배낭 무게는 1/3이 줄었다. 인생이 경쾌해졌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태그:#벼룩시장, #멕시코여행, #라파스, #멕시코시티, #여행자의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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