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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동학혁명군 살육에 일본 정부와 군부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그리 새삼스럽진 않다. 살육은 '들판을 깨끗이 청소'한다는 청야(淸野) 작전으로 감행된다. 청일전쟁 지휘소인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일본 정부 내각 수반인 총리 이토 히로부미 명령으로 군부 수뇌부인 참모총장 이하 군벌 최고 지휘관들이 공동으로 입안하고 결의한 작전이다.

'모조리 살육하라'는 내용의 작전을 조선에 불법으로 파견한 부대에 하달하며, 군대를 4천 명으로 증원한다.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각지 동학군을 우선 섬멸한다. 이로써 주력인 전라도 동학군과 연계를 차단한다. 그다음 전라도 동학군을 3면에서 압박, 서남해안 끝까지 밀어붙여 고립시킨 후 전멸한다는 극악한 작전이다.

이로 미루어 일본도 조선에서 가장 큰 저항 세력으로 동학혁명군을 지목했음이 확실하다. 동학혁명군을 제거하지 않고선 조선 식민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겼을 개연성이 높다. 정규전을 방불한 전쟁은 동학혁명군이 유일했다. 이후 의병은 소규모 유격 활동일 뿐이다. 1907년 정미7조약 후 '남한대토벌작전'의 의병도 규모와 저항 강도에서 동학혁명군에는 미치지 못했다.

1894년 겨울 일본군이 살육한 동학군을 전국적으로 10만∼30만 명으로 추정한다. 이들의 원통한 죽음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논산 혁명군 지휘소

논산에 혁명전쟁 지휘소가 꾸려진다. 들판에 솟은 낮은 소토산이 크고 작은 장막으로 가득 찬다. 무기와 군량미, 군사들의 전투준비태세를 꼼꼼하게 다시 점고한다.
 
호서 이북의 기포는 …(중략)… 그 수 또한 십만에 달한지라 이들 모두를 손병희가 영솔하여 남방으로 향하였다. 이때 호남, 호서, 영남, 강원, 경기 등 각 도의 동학군 대부분이 모두 한곳으로 모이니 은진, 논산을 중심으로. (동학사. 오지영. 문석각. 1973. p250 의역)
 
전주에 진군한 김개남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계속되는 파발에도 묵묵부답이다. 김개남의 고민도 적잖았다. 49일이 지난 10월 보름에 모인 군사는 일만여 뿐으로, 예상 전력의 1/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용맹한 포수부대와 재인 부대마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전주화약에 반대하던 기세로 그만의 방식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구체제를 통째로 바꾸어 나라를 반석 위에 세우려던 웅지가, 그러나 뿌리째 흔들리는 느낌이다.
 
3.1만세 운동 주역인 천도교. 천도교를 이끈 손병희 선생 동상을 3.1만세 운동 발상지인 탑골공원에 설치하는 광경.
▲ 손병희 선생 동상 제막식(1966) 3.1만세 운동 주역인 천도교. 천도교를 이끈 손병희 선생 동상을 3.1만세 운동 발상지인 탑골공원에 설치하는 광경.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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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음) 북접이 군대를 꾸려 진격해 왔다. 손병희가 이끄는 수천 군사가 논산에 당도함으로써 남·북접이 드디어 만나, 명실상부 혁명군 대도소가 논산에 꾸려진다.
 
논산의 동학군 대도소에서, 호남 전봉준과 호서 손병희 양 대장이 서로 만나 손을 잡는다. 오래된 사이처럼 간과 쓸개를 서로에게 내보이듯 속마음을 털어놓고 친해져 뜻과 기백이 부합했다. 드디어 형제의 의를 맺어 생사고락을 동맹하니 전(全)은 형이 되고 손(孫)이 아우가 되었다. 이날로부터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장막에서 잠을 자며 기타 모든 일에 똑같이 보조를 맞추기로 약속하였다. (앞의 책. p250 의역)
 
주력이라는 남접군 무기는 조·일 연합군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다. 하물며 북접은 그야말로 죽창 든 군사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간이 화승총과 천보총만 있을 뿐 무기만 본다면 도저히 군대라 칭할 수 없는 열악한 수준이다.
 
동학혁명군 주력 무기이던 화승총. 이마저도 태반 군사가 갖지 못했다.
▲ 화승총 동학혁명군 주력 무기이던 화승총. 이마저도 태반 군사가 갖지 못했다.
ⓒ 이영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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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우리나라 총의 사정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본 총 사정거리는 4~500보도 더 되었으며, 불이 총대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 불을 붙이는 번거로움이 없다. 따라서 비록 눈이나 비가 내린다고 해도 계속 쏠 수 있다. 동학군과 수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동학군의 총탄이 미치지 못할 것을 헤아린 다음 비로소 총을 쏘았으므로, 동학군은 빤히 쳐다보면서 감히 한 발도 쏘지 못했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269 의역)
 
이즈음 대구, 선산, 김천, 진주가 차례로 무너진다. 일본군 급습에 속수무책이다. 조·일 연합군은 섬진강을 방어선으로 전라도 불길이 경상도에 옮겨붙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황해도 사정도 경상도와 다르지 않았다. 해주가 용산에서 파병된 일본군에 함락되어, 북쪽으로 쫓겨 갔다. 그만큼 훈련이 잘되어 있는 일본군은 동학군의 정보를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첩보 활용과 작전 수행에 능숙한, 근대 전쟁을 수행하는 기본부터 달랐다.
 
동학혁명군이 혁명전쟁 지휘소인 논산 대도소를 꾸렸다는 소토산.
▲ 논산 대도소 터 동학혁명군이 혁명전쟁 지휘소인 논산 대도소를 꾸렸다는 소토산.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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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로지 남·북접군과 김개남 부대, 충청도와 경기도 일부만 남았다. 논산 대도소는 김개남 부대가 북상하는 시각, 공주 공격을 개시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한다.

청야 작전

조선 조정은 '조일공수동맹(1894.08)'으로 혁명군 토벌을 간청하며 작전 및 지휘권까지 일본군에 넘겨버린다. 이에 일본은 파견된 부대에 후비 보병독립 19대대를 추가하여 구성한 '동학당 토멸대'로 진압을 개시한다. 이른바 작전명 '청야 작전'. 일본군은 히로시마 대본영의 살육 지시에 따라 3개 방향으로 남하한다.
 
10월 27일(양) 밤, 일본군 병참선 조선 총사령부로서 인천에 설치된 인천병감부에 히로시마 대본영 가와카미 소로쿠 병참총감으로부터 전신이 도착했다. 동학농민군에 <엄렬>하게 대처하고 <모조리 살육할 것>이란 내용이다. 다음날인 28일 저녁, 동학농민군 토벌을 전임으로 담당하는 <동학당 토멸대> 3개 중대, 곧 후비 보병독립 19대대를 일본에서 새롭게 파견한다는 연락이 가와카미 병참 총감으로부터 인천병감부에 당도했다. 이러한 3개 중대는 11월 10일부터 농민군을 토멸하면서 남하했다. 한반도 서해안 가까운 공주 가도(서로)는 2중대가, 중앙부 청주 가도(중로)는 제3중대가, 동쪽 일본군 병참선 인근 대구 가도(동로)는 제1중대가 맡았다 …(중략)… <동로 분진 중대를 조금씩 먼저 나아감으로써 비도를 동북으로부터 서남, 즉 전라도 방면에 구축(驅逐=몰아냄)할 것에 힘써야 할 것이며, 만일 비도들이 강원, 함경 방면 곧 러시아 접경에 가까운 지방으로 도주하게 되면 후환을 남길 우려가 적지 않으니 엄밀하게 이를 예방 해야 할 것>이라고 …(중략)… 농민군이 며칠에 걸쳐 일본군과 대규모로 싸웠던 전투로는 홍주·공주·장흥·순천(이상 전라도)과 괴산·보은(이상 충청도), 재령·해주(이상 황해도)이고 총 4천 명이 동원된 일본군이 벌인 전투는 하도 많아서 여기에서 모두 열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본, 한국병합을 말하다. 이노우에 가츠오 外. 최덕수 옮김. 열린책들. 2011. p75~77 의역)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요시미치(조선 2대 총독)가 나란한 사진. 이 둘은 차례로 조선을 억압한 인물이다.
▲ 이토와 하세가와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요시미치(조선 2대 총독)가 나란한 사진. 이 둘은 차례로 조선을 억압한 인물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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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총리도 <대본영에 주의할 것>이라고 승낙해, 15일에야 대본영 병참총감이 서울 수비대 일부를 안성과 죽산으로 보낼 것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부대는 17일에 출발했다 …(중략)… 오토리 공사의 문장은 <동학농민군이 귀순하지 않을 때는 조선 정부가 군대를 내어《처형》할 것. 일본도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원조한다>고 적어 회답을 구했고, 글 말미엔 <일본 군대와 협심하여 서로 힘을 모아 조속히 비도 초멸의 효과를 받들 것>이라고 하여 조선 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초멸 剿滅=무찔러 없앰> 살육하도록 압박했다. (앞의 책 p84)
 
동학농민군을 북동쪽으로부터 서남쪽으로 크게 포위해 전라도 서남단 농민군 근거지로 몰아 섬멸하는 작전으로 확대한 것이다 …(중략)… 공주, 청주, 대구의 3개 가도를 분명히 묘사하고 있다. 군부가 제시한 동학 농민 <모조리 살육> 책에 대해 무츠 외무대신도 이론이 없었고 …(중략)… 동학농민군에 대한 3로 포위 섬멸 작전은 조선 조정의 외교부와 군부가 입안한 것이 아니다. 도쿄의 무츠 무네미츠 외상이 참석한 가운데,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총리 이토히로부미, 참모총장 아리스가와노미야, 참모 차장 겸 병참총감 가와카미소로쿠 이하 정계, 군벌의 최고 지도자들이 공동으로 입안·결의해 조선 현지로 명령한 작전이다. <토벌대대> 후비 보병 제19대대는 불법적인 <모조리 살육> 작전을 조선 남부 대부분 지역에서 실행할 것을 명령받았다. (앞의 책 p96~97)
 
그동안 일본은 공사관을 오토리에서 이노우에로 교체한다. 그에게 직접 공주에 가 현지 지형·지세를 파악하여 작전 및 보급계획을 수립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라 명령한다.
 
활처럼 휘어지는 논산천 가까운 곳에 대도소를 꾸렸다는 소토산. 호남선 철길을 건너는 육교에서 바라 본 모습.
▲ 소토산 활처럼 휘어지는 논산천 가까운 곳에 대도소를 꾸렸다는 소토산. 호남선 철길을 건너는 육교에서 바라 본 모습.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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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군은 일본의 철두철미한 전쟁 준비에 놀라면서도, 진격 논의 결론을 매듭짓지 못한다. 김개남도 전주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논산에서 허비한 이 며칠이, 전략상 엄청난 오류였음이 드러난다.

태그:#논산대도소, #히로시마대본영, #이토히로부미, #2차봉기,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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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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