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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해전 현장 탐사 대원들이 15일간 항해를 마친 후 쓴 항해기입니다. 1차 항해는 5월 22일부터 5월 28일까지 동방항로, 2차 항해는 6월 3일부터 6월 11일까지 서방항로로 15일간입니다.[기자말]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대원들이 칠천도 옥계항에 정박한 율리안나호에서 기념촬영했다.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대원들이 칠천도 옥계항에 정박한 율리안나호에서 기념촬영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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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해전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율리안나호가 방문한 곳은 칠천량이다. 학창 시절 임진왜란에 대해 공부할 적에는 진해와 부산 거제도는 상당히 먼 거리에 따로 떨어져 있는 지명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배를 타고 이순신 장군의 해전 현장을 돌아보니 한산도·거제도·당항포·칠천도·진해·가덕도·부산이 한 바다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왜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주둔하며 견내량 방어작전을 통해 왜수군이 서진하지 못하도록 했는지가 이해됐다. 아울러 왜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했는지도 보였다.
  
견내량을 거쳐 칠천량으로 항하는 항로 오른쪽에 있는 거제도에는 거대한 조선소들이 있었다.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한 지인의 말에 의하면 34개국 노동자들이 와서 일하기 때문에 국제시장같은 분위기라고 한다.  심지어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온 노동자도 있다고 한다.
 견내량을 거쳐 칠천량으로 항하는 항로 오른쪽에 있는 거제도에는 거대한 조선소들이 있었다.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한 지인의 말에 의하면 34개국 노동자들이 와서 일하기 때문에 국제시장같은 분위기라고 한다. 심지어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온 노동자도 있다고 한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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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왼쪽에 있는 칠천도 모습. 칠천량해전 당시 일본수군에 사방으로 포위되어 아우성쳤을 조선수군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프다.
 거제도 왼쪽에 있는 칠천도 모습. 칠천량해전 당시 일본수군에 사방으로 포위되어 아우성쳤을 조선수군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프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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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재침과 선조의 오판으로 인한 이순신 파직

임진왜란 중 일본은 명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 1월 조선을 재침략했다.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넜으니 국사가 이미 결단났다"고 하면서 기요마사를 잡지 않고 놓아준 이순신을 나국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삼을 것을 비변사에서 논의하도록 명령했다. 나국은 죄인을 잡아 신문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반간계와 왜영 방화 사건, 그리고 잘못된 정보 때문에 원균을 과대평가했던 선조의 오판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으로 귀결됐다.

원균이 통제사로 임명된 2월 말부터 안골포와 가덕도 등을 오가며 소규모 전투를 벌였던 통제사 원균은 체찰사와 도원수의 출전 명령에도 불구하고 출동을 거부하다가 1597년 6월 18일에 부산으로 출항했다. 작은 규모의 전투를 벌였던 원균 함대는 7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후 일본함대와 해전을 시도했다.

접전을 회피한 일본함대는 계속 회피하는 전술로 원균 함대를 지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큰 바다로 나간 원균 함대 중 일부가 표류하여 겨우 수습했다. 이때의 상황을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원균이 절영도에 이르렀을 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함대가 정박할 곳은 없었다. 일본 군선들이 바다에 출몰하는 것을 본 원균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앞으로 나갔다. 선박에 탔던 장병들은 한산도에서부터 종일 노를 저어왔는데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또 물을 마시지 못해 기갈에 시달려 배를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하였다."
  
칠천량해전공원에 전시된 조선수군 모습
 칠천량해전공원에 전시된 조선수군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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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함대가 가덕도에 도착하자마자 선원들은 물을 구하려고 상류하였다가 매복하고 있던 일본 육균에 의해 약 400명이 살해당했다.

조선수군은 거제도 북단 영등포로 이동했지만 그곳에도 매복한 일본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이튿날인 7월 15일 원균 함대는 풍랑을 무릅쓰고 함대를 영등포에서 칠천량으로 이동했다.
 
칠천량해전공원에서 촬영한 칠천도 주변 모습. 그날의 패전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아팠다.
 칠천량해전공원에서 촬영한 칠천도 주변 모습. 그날의 패전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아팠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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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바다로 임란 초기부터 조선수군이 자주 정박하던 곳으로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다. 조선 함대의 이동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일본 수군은 야간에 출동해 칠천량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선전관 김식은 초기 전투 상황에 대해 다음과 보고했다.
 
"15일 밤 10시쯤 일본함대가 습격하여 우리 전선 4척이 완전히 불타 침몰되었고 그 뒤 어렵게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닭이 울 무렵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본 군선이 몰려와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함대의 습격을 받은 원균 함대는 서둘러 대항해보려 했지만 이미 대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 통제불능 상태가 되고 말았다. 조선함대는 두 방향으로 나누어 탈출했는데 하나는 진해만 쪽으로 향했고, 다른 하나는 거제도 해안을 거쳐 한산도 방향으로 향했다.

진해만 쪽으로 도망간 조선 함대는 일본 수군의 추격을 받아 참패했다. 칠천량을 거쳐 거제도 해안으로 내려간 조선수군에는 원균과 배설이 있었다. 배설이 거느린 전선들은 견내량을 거쳐 한산도로 먼저 탈출하였고 원균 함대는 고성 땅 추원포로 물러나 상륙했지만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모습 옥계항 바로 위에 있다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모습 옥계항 바로 위에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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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사>를 쓴 이민웅은 조선 함대가 칠천량에서 참패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째는 수군의 군령권 즉, 작전권이 통제사가 아닌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속해 있었다. 이것은 결국 해전을 모르는 문신들에게 수군을 지휘할 권한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선조 역시 도원수말만 듣고 출전을 독촉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둘째는 군사들의 '도망'을 들 수 있고, 세 번째는 이를 막지 못한 원균의 지휘 책임, 즉 통솔력 부족을 지적할 수 있다."

기습당해 붕괴된 진형때문에 전선을 버리고 도망간 군사들은 대부분 주변 섬과 해안에 매복해 있던 일본 육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해전으로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가 전사했으며, 조선의 삼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졌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에도 '도망'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군법을 어긴 병사들에 대한 징벌이 엄격했다. 약속을 어기거나 군법에 어긋난 군사를 발견하면 곤장을 치는 건 다반사였다. 첫 출전을 하루 앞둔 1592년 5월 3일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여도 수군 황옥천이 집으로 도망친 것을 붙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에 매달았다."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칠천량의 패전은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이 한 일이다"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
 
칠천량 옥계항에 정박해 있는 율리안나호 모습. 대원들은 정유재란 당시  칠천량해전에서 수중 고혼이 된 조선수군들의 명복을 빌었다.
 칠천량 옥계항에 정박해 있는 율리안나호 모습. 대원들은 정유재란 당시 칠천량해전에서 수중 고혼이 된 조선수군들의 명복을 빌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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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고 권준을 충청수사로 삼아 패전 뒷수습과 수군 재건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예부터 지도자의 무능은 집단에 속했던 그룹을 망쳤다. 그 지도자가 한 나라의 수장이라면 그 나라의 운명은 말할 필요가 없다.

태그:#이순신해전현장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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