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부산에서 국어 교사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 6년을 살았다. 그 기간 작은 내 방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이 쌓여 갔는데, 책장을 놓을 공간이 없어 박스에 책을 쌓아두고 지냈다.

게다가 축구와 헬스를 즐기고 패션에도 관심을 두면서 짐은 끝도 없이 늘어났고, 내 방은 창고에 사람이 누워 지내는 느낌으로 변해갔다. 박스에 쌓아둔 책이 넘쳐 쏟아질 때면 독립해서 큰 책장에 책을 가득 꽂아두고 싶었다. 내 형편에 드레스룸을 가질 수 없다면 넓은 원룸이라도 구해서 옷을 위한 공간이라도 따로 만들어 놓고 싶었다.
늘 박스에 넘치도록 쌓아뒀던 책을 독립하며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책장과 책을 쓰다듬기만 해도 뭉클해질 때가 있다.
▲ 책으로 채워진 내 방의 풍경 늘 박스에 넘치도록 쌓아뒀던 책을 독립하며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책장과 책을 쓰다듬기만 해도 뭉클해질 때가 있다.
ⓒ 민재식

관련사진보기

 
내 방을 꾸미다

일하는 학교도 가까운데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며, 미루고 미루던 독립을 작년에 갑작스레 하게 되었다. 그것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 채용에 합격하게 되어 부산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매일 책에 파묻혀 지내고, 온라인 공부 모임을 하느라 퇴근만 하면 창고 같은 방에서 노트북을 놓고 울고 웃는 나를 부모님은 언제나 '특이하다'고 했다.

서울에서 살아보겠다고 했을 때는 굳이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야겠냐고, 내 아들이지만 내가 참 독특한 애를 낳은 것 같다고 말하셨다. 그럴 때 나도 부모님과 내가 분명히 유전자로 이어져 있는데 인생의 초점과 욕망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서울 성북천이 흐르는 조용한 동네에 9평 정도 되는 분리형 원룸을 구했다. 서울의 공공자전거 '따릉이' 정류장이 코앞에 있었고 자전거로 10분이면 새로운 학교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개학하기 한 달 전 미리 이사를 했고, 그때부터 내 방을 꾸미기 시작했다. 꼬박 2달을 넘게 방을 꾸미는 데 시간을 썼다.

나는 부산에서 살며 품었던 모든 희망 사항을 실현했다. 크고 튼튼한 책장을 사서 박스에 있던 책을 모두 꽂았다. 커다란 원목 테이블을 책장 옆에 놓았다. 6년 동안 일하면서 모은 돈을 퍽퍽 쓰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페르시안 카펫이 깔려있고 원목 가구로 가득 찬 내 방을 완성했다. 침대 위에는 무늬 없는 짙은 초록색 이불을 깔았고, 책을 읽거나 멍때릴 때 좋은 1인용 소파도 샀다. 방 한쪽에는 바다와 푸른 나무가 함께 있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커다란 사진 액자를 놓았다.

'이제 방이 완성됐구나.' 그런 느낌이 왔던 날, 괜히 소파에 앉아 방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을 손으로 쓰다듬기도 했다. 모든 걸 완성하고 나니 어쩌다 내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어쩌다 교사가 되었고 서울까지 왔는지, 이런 공간을 꾸미고 싶은 욕구는 어디서 생긴 건지 여러 생각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자취의 외로움과 자유로움을 오가며 여름을 보내는 동안에도 그날 책장을 만지며 떠올린 의문들을 종종 생각했다.

그해 추석 연휴에 부모님이 서울로 오셨다. 서울살이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셨고, 평생 경상도에서만 살면서 말로만 듣던 서울을 아들 덕에 구경해보고 싶다고 했다. 직접 만든 식혜와 냉동 오리 불고기를 바리바리 짊어지고 온 부모님은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누구 아들래민지 참 잘 꾸며놓고 사네"라고 했다.

부모님의 낯선 모습

2박 3일 동안, 부모님은 첫날만 용산 중앙박물관에 다녀왔고, 남은 날은 원래 계획했던 등산도 서울 구경도 모두 하지 않고 내 방에서, 내가 사는 성북천 주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성북천을 뛰고 와서는 원목 테이블에 앉더니 스피커로 음악 좀 틀어달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쉬는 동안 아버지는 나와 함께 성북천을 따라 자전거를 탔고, 햇살이 비치는 카페에서 함께 커피를 마셨다.

부산에 살 때 아버지와 햇살이 좋다거나, 카페 분위기가 좋다거나 하는 시시콜콜한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애초에 카페를 둘이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커피 맛에 대해, 성북천의 평화로움에 대해 말했다. 그동안 이런 시간이 불가능했던 것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가지런히 세워진 자전거를 뒤로 하고 차분차분 이야기를 이어가는 아버지가 새롭기도 반갑기도 어렵기도 했다.
아버지, 사촌동생과 함께 따릉이를 타고 달리다 성북천 옆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가 낯설지만 좋았다.
▲ 카페에 앉아서 아버지, 사촌동생과 함께 따릉이를 타고 달리다 성북천 옆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가 낯설지만 좋았다.
ⓒ 민재식

관련사진보기

 
부산으로 돌아가는 날, 아버지는 짐을 챙기다 말고 내 방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아 연신 '내도 그냥 여기 살고 싶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살림살이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는 '가구 야문 걸로 잘 샀다, 재식아. 요런 책장이랑 테이블 크게 놔두니까 참 좋네'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부산으로 돌아가고 방을 치우고, 코인세탁소에서 이불 빨래를 했다. 집을 치우다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나서 코인세탁소 앞에서 성북천을 바라보며 전화를 걸었다.

"엄마, 집에 잘 도착했나? 매번 명절 때마다 이걸 어째했노."
"힘들제. 하루에 다 치우지 말고 천천히 해라. 그래도 집이 작아서 금방 할끼다. 그리고 식아. 내 가구 좀 골라도. 원래 니 방에다가 엄마도 책꽂이 놓고 서재처럼 만들어 볼라고. 맨날 밥상에 앉아서 뭘 읽고 쓸라니까 힘들어서."


어떤 가능성

어린 시절 어머니는 매일 네모난 밥상에 앉아 가계부를 썼다. 너무 당연해서 지나쳤을 뿐 엄마는 늘 뭔가를 읽고 썼었다. 집 여기저기에도, 장사를 하던 계란 가게 벽면에도 온통 메모가 붙어 있었다. 거기엔 또박또박 엄마의 글씨로 옮겨 쓴 부처님의 조언이 있기도 했고, 요리책에서 발견한 비법 레시피가 적혀 있기도 했다.

교사가 되어 함께 살 때 어머니는 늘 <팬텀싱어> <슈퍼밴드> 같은 음악 예능을 즐겨봤다. 아버지가 옆에서 <사랑과 전쟁> 다시 보기를 틀어보라고 칭얼거려도 그 방송만큼은 본방송을 사수했다. 나는 이어폰을 항상 끼고 온갖 음악을 들으면서도 엄마가 좋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교사로 임용되어 임명장을 받아 왔던 날, 소주잔을 기울이며 "내도 어릴 때 섬마을 선생님 되는 게 꿈이었다 아이가. 축하한다"라는 말을 했다. 그 이후로도 종종 그 말을 농담처럼 했는데 나는 그다지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교사도, 교육계열 직업을 가진 사람도 없는 우리 집에서 내가 특이한 존재라고 여겼다. 읽고 쓰기를 즐기고 계속 뭔가를 배우고 시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집안에 나뿐이라고 여겼다. 그저 아버지는 무디고 어머니는 분주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이 떠난 서울 자취방을 모두 치우고 소파에 앉았다. 책으로 가득 찬 책장과 테이블을 쳐다보며 어떤 가능성을 생각했다. 어쩌면 서재 비슷한 이 공간이 엄마의 가능성은 아니었을까. 냉장고에 붙여둔 학생들의 응원 편지는 아버지가 인생의 어떤 순간에 바랐던 가능성은 아니었을까. 많은 것이 지나고 나서야 부모님의 가능성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요즘 새로 산 책장에 집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책을 모두 꽂았다고 한다. 이젠 내가 쓰던 책상에서 가계부를 쓰고 책을 읽는다고 한다. 버스 기사인 아버지는 나와 통화할 때면 내가 교사로 근무했던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 오늘 버스에 억수로 탔다는 소식을 들떠서 전한다. 나와 부모님은 어떤 가능성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부모님 모습.
 부모님 모습.
ⓒ 민재식

관련사진보기


태그:#아버지, #어머니, #가족, #가능성
댓글2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7,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무해한 사랑을, 그런 사랑을 가꾸고 지키는 존재를 찾아다닙니다. 저를 통과한 존재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