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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왼쪽 첫 번째가 이윤재의 사위 김병제, 네 번째가 조선어학회 간사장인 이극로, 다섯번째가 이희승, 여섯번째가 정인승)
▲ 1945년 11월 조선어학회 재건때의 모습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이윤재의 사위 김병제, 네 번째가 조선어학회 간사장인 이극로, 다섯번째가 이희승, 여섯번째가 정인승)
ⓒ 조선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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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은 이화여전 시절인 1932년 일석(一石)이란 호를 지었다. 호는 자신이 짓기도 하고 스승이나 선배가 지어주는 경우도 있다. 한때 주위에서 '대추씨'라는 별칭이 있었고, 본인은 한동안 석천(石泉)으로 호를 짓고자 생각하였다.      

그는 당대의 명망 있는 수필가이기도 하는데, 대표작의 하나에 <호변(號辯)>을 든다. 호에 대해 변명 또는 설명한 글이다. "호라는 것은, 나이깨나 먹고 인간으로서 틀거지가 잡혀서, 사람다운 일을 좀 입내라도 낼 만한 시기가 되어야, 하나 가져보는 것이 그럴 듯 하고, 또 이런 나이가 되면, 친구끼리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는, 피차간에 호를 부르는 것이 점잖다 할까, 고상하다 할까, 정답다 할까, 풍류적이라 할까, 무어라고 딱 때려서 말할 수는 없지마는, 그저 그렇듯 하다고 하여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주석 1)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은 중학교 3, 4학년 시절에 벌써 호를 가지고 싶어 했다고 썼다. 그래서 돌 틈에서 나오고 샘물이란 의미의 '석천(石泉)'을 생각했는데 어느날 은사가 "사람이란 텁텁하고 수더분하고 어수룩한 맛이 있어야지, 너무 맑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 은사는 일반론을 이야기한 것이다. 실제 이희승의 성격·성향과는 잘 맞지 않는 입론이었던 것이다. 은사는 고향의 군과 면의 명칭을 따서 '풍남(豊南)'이라 지어주었다. 그리고 석천이란 호는 너무 흔해 빠졌다. 고서를 뒤져보니 이 호를 쓴 문사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돌과 샘물'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이 따랐다. 두 자 가운데 하나라도 취하고 싶었다. 

나는 이 두 글자를 전연 단념할 수는 없었다. 은사가 지어주신 호와도 바꾸지 못하던 이 두 글자를 그렇게 창졸간에 떼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 중의 한 글자만이라도 그대로 지니고 싶었다. 그러면, 어느 글자를 버리고 어느 것을 취할까. 이것이 또한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다. '샘'이 좋으냐 '돌'이 좋으냐, 나에게는 둘 다 같은 정도로 좋았다. 암만 저울질을 하여도 넘고 처지는 것이 없었다. 

최후로, 나는 자기반성을 하여 보았다. 샘과 돌이 되기를 바라서 자계를 삼는다 해도 성취할 가망이 없다. 생각다 못하여 '석(石)' 자를 취하기로 했다. 둔하고 무리한 것이라든지, 모양이 곱지 못한 것, 활동성이나 탄력성이 전혀 없는 것, 이 모든 점이 나 자신과 방불하여, 오리알에 제똥 묻기로, 내격에 맞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 나는 돌이다.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 같이 변통성 없는 한 개의 돌이다. (주석 2)

선인들의 '호변'을 많이 들어보았지만, 이토록 고심 끝에 자신의 성향과 '모습'에 걸맞은 호를 지은 사유는 흔치 않았다. 석천이나 풍남보다 그에게 가장 적합한 아호인 듯 하다.

'석(石)' 자를 취하기로 작정한 다음에, 또 한 자를 무엇으로 할까. 외자 호는 좀 거북하고, 무엇일지 한 자 더 붙여야지. 이렇게 생각한 나머지, 나는 '한 개의 돌'에 지나지 못하는 존재이므로, '일(一)' 자를 빌어다가 '일석(一石)'으로 결정하여 버렸다. 이것이 아마 내가 경성사범학교를 떠나서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가던 해(1932년)라고 기억된다. (주석 3)

그는 시대가 바뀌고 직위가 변해도 '한 개의 돌'을 자처하며 살았다. 큰 바위가 아닌 작은 돌(멩이), 흔하디 흔한 돌로 자임한 것이다. 민초와 같은 존재라 하겠다.

'석(石)'은 <여씨춘추>에 나오는 '석가파 이불가탈기견(石可破 而不可奪基堅)'의 뜻에서 택한 것이요, '일(一)'은 진귀한 것을 버리고 세상에 흔한 한낱 '돌'에 지나지 않다는 뜻에 따랐노라 한다. 그래서 일석, 여기에 그 분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태도와 그 성품이 풍겨 있다고 본다. 

돌도 여러 가지가 있다. 푸석푸석 부서지는 푸석돌도 있고, 물에 뜨는 가벼운 부석(浮石)들도 있고, 연장을 가는 숫돌도 있고, 먹을 갈아 글과 그림을 그리어 선비의 벗이 되는 버릇돌도 있다. 또 그뿐이랴, 집을 지을 때는 주춧돌이 되고, 석조 건물엔 기둥이 되고, 우리의 국보 석굴암의 석불도 돌이요, 석가탑 다보탑도 돌로 되어 있으니, 우리의 생활, 우리의 문화가 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어찌 그뿐이랴! 옥(玉)도 돌에 틀림이 없으니, 금강석을 비롯한 모든 민석이 돌의 일종이 아닌가? 

그러나 일석 선생의 '石'을 인간 물욕의 대상이 되는 '玉'에 비한다면 선생은 대노할 것이다. 한낱 단단한 돌. 즉 차돌이 그 분의 뜻에 맞을 것으로 생각한다. 차돌은 돌중에 돌이라. 다시 말하면 돌의 성격이 가장 잘 갖춘 돌이다. 보석이 아닌 예삿돌 중에서는 가장 단단한 돌이요, 때묻지 않은 맑은 빛을 지녀서 속되지 않는다. 그분의 <국어대사전>에 '차돌'의 뜻풀이를 보면 "야무진 사람의 비유"라고 했다. (주석 4)


주석
1> <호변>, <한 개의 돌이로다>, 62쪽.
2> 앞의 책, 68쪽.
3> 앞의 책과 같음.
4> 김형규, <딸깍발이 정신의 구현>, <일석 이희승 - 딸깍발이 선비>, 21~2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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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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