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영산 고을의 진산인 영축산은 경사가 가파르고 바위가 많으며, 산의 형태가 불꽃같아서 화기(火氣)가 강한 산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산의 불기운도 누르고, 농업 용수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마을 한쪽에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의 모양이 벼루를 닮았다 하여 벼루연못 즉 연지(硯池)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동안 관리 소홀로 연못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다가 1889년 새로 부임한 신관조 현감이 대대적인 정비를 하고 다섯 개의 섬을 만들었으며 그중 큰 섬에다 정자를 세우고 항미정(抗眉亭)이라 명명했다.
"옛사람이 잘해 놓은 것을 뒷사람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버려둔 것이라 하였다. 내 탄식하며 수천 민호를 동원하여 하루의 역사로 우거지고 쌓인 것을 걷어치우고 몇 자 더 깊이 파내니 물이 용 솟아 나오고 다시 개울의 냇물을 끌어오니 얼마 되지 않아 맑은 물이 고이고 차서 넘치니 바로 거울 같은 호수가 완연하여 마치 얼굴의 눈썹 같더라. 주위 넓이가 팔백 보요 깊이가 몇 길이 넘을 것 같으며 못 가운데는 다섯 섬이 있어 오성(五星)을 모아 놓은 형상이라 느티나무 버드나무와 꽃과 대나무를 가지런히 심은 호복(濠復-복원한 연못)은 한가한 상념(想念)을 드러냈다." (신관조의 항미정 기문)
연지에서 조금 걸어가니 만년교(萬年橋)가 보인다. 만년교는 정조 4년(1780년)에 처음 축조되었고, 고종 29년(1892년)에 연지를 정비한 신관조 현감 때 중수한 후 몇 번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무지개모양으로 쌓은 돌다리는 구조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감탄을 자아내며 주변의 수양 벚나무와 함께 개울에 비친 모습이 아름다워 사진 명소로 유명한다.
만년교 앞쪽에는 홍살문이 있어서 이 일대가 성스러운 장소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곳은 총 165만㎡의 면적으로 1973년 도시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82년 전국 최초로 호국공원으로 재조성 되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한국의 호국공원 중 손꼽히는 곳으로 우리나라 3대 국란의 호국의 성지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호국충혼탑, 3·1 운동 봉화대 및 기념비, 6·25 전쟁 영산지구 전적비가 있다. 임진왜란 호국충혼탑 뒤로는 물레방아가 돌고 있다. 영산 군이 경상남도 최초로 3·1 운동이 일어났던 곳임을 기념하여 이곳에서는 매년 3·1절 기념식이 거행된단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매번 저항의 불씨를 살린 이유는 무엇일까?
호국공원에는 가파른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올라가니 6.25 전쟁 전적비가 있고 영산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스케치북을 펼쳤다. 오른쪽으로는 영축산이 있고 산을 타고 죽 내려오면서 마을이 펼쳐지고 왼쪽 아래에 연지가 있다. 여기서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했다.
'이 마을의 이야기는 모두 영축산에서 시작되는구나.'
마을 가까이에 있는 가파르고 화기가 있는 산. 연못을 파서 화재의 가능성을 줄이기는 했지만 마을 사람들 가슴속에 있는 작은 불꽃을 꺼트리지는 못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불의를 보면 가장 먼저 열정적으로 일어나 나라를 바로 세우고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영축산의 정기를 받은 게 아니었을지.
그들의 공동체 정신이 영산쇠머리대기나 영산줄다리기를 살리는 원동력이고 3.1 민속 문화제로 면면히 이어지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어디 가나 이야기가 풍성하다. 특히 영산 마을처럼 오래된 마을에서 더 풍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즐겁다.
(창녕군 영산면 여행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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