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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앉기도 벅찬 테이블에 몸을 틀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주방. 20평 남짓한 명장의 빵집은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길쭉한 조리모를 쓴 채 주방에서 나오는 명장의 첫인상도 마찬가지였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대가의 아우라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영락없이 마음씨 좋아 보이는 이웃집 아저씨였다. 
 
최창진 명장.
 최창진 명장.
ⓒ 박재헌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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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진(58) 명장이 계양구의 한 아파트 단지 상가에 '빵뜨락'이라는 이름으로 제과점을 차린 것은 지난 2003년이다. 개업 후 20년 만에 인천에서 기술인 최고의 영예인 명장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인천이 제2의 고향'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천이 그에게 기회의 땅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혹독한 시련을 안겨준 도시가 바로 인천이었다.

전남 강진이 고향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가 고교 1학년 때 부모님은 행상하면서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방앗간을 차렸다. 그는 부모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는 형과 영민한 두 동생에 비해 특별히 돋보이는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방앗간 일은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가 돕게 됐다.

"어느 날 어머니가 '방앗간을 물려줄 테니 맡아서 해보라'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그때 저는 제과·제빵 쪽에 관심을 더 두고 있었어요. 앞으로 사람들이 케이크와 빵을 많이 먹을 거라 생각한 거지요."

방앗간을 물려받았지만 떡 대신 빵을 선택한 그는 1985년 고교 졸업과 동시에 제과점에서 보조 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밤새 뒤치다꺼리를 해주고 기술 한 가지 배우는 식으로 실력을 연마했다.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군 제대 후 젊은 혈기에 차린 가게가 두 번이나 망하면서부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으로 찾은 곳이 부평의 랑데부제과점으로, 그는 1994년부터 이 제과점에서 일하면서 인천에 둥지를 틀었다.

그의 인천살이는 지금의 '빵뜨락'으로 이어졌고, 개업 3년 후인 2006년에는 제과 기능장까지 취득했다. 그런 그에게 10여 년 전 큰 위기가 찾아왔다. 인근에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들어서면서 하루아침에 쫄딱 망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7명이 일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었는데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손님들을 모두 뺏겼어요. 단골도 많았고 동네에서 인심도 잃지 않았었는데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자본을 앞세운 프랜차이즈의 횡포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한번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러 밖에 나갔다가 차마 죽지 못하고 집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어 있을 때였다. 뭔가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당시 초등학교 2년생이었던 막내아들이 옆에서 울고 있었다. 막내의 손에는 유명 프랜차이즈 제품인 소보루빵이 들려져 있었다. 

"아빠, 우리 집 망하는 거 맞아?" 고사리손에 들린 소보루빵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막내의 눈물로 젖어갔다. 그 소보루빵은 빵뜨락의 단골이었던 친구의 엄마가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잔뜩 사서 아들 친구들에게 나눠준 빵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우리 엄마가 '너희 집 곧 망한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억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막내의 눈물은 그가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됐다. 
 
제14호 인천광역시 명장 명패.
 제14호 인천광역시 명장 명패.
ⓒ 박재헌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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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시작했어요. 대출을 받아 가게를 리모델링하고 당뇨 환자를 위한 빵을 개발하는 등 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지요. 그러다 보니 손님도 차근차근 다시 돌아오더군요."

오래전부터 베푸는 삶이 몸에 밴 그였지만 시련을 겪고 나서는 봉사와 후학양성에 더욱 매진했다.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담은 2종의 제과 기술 관련 서적을 저술하고 5종의 제과·제빵 도구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대통령 표창, 인천광역시장 표창, 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 위촉 등 화려한 이력이 쌓여갔다.

하지만 가장 돋보이는 것은 그의 봉사 이력이다. 다문화가정 케이크 및 빵 만들기 봉사, 사회복지 자원봉사, 인지재활학교 및 요양원 봉사 등 빵으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은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다.

이로 인해 당초 장관 표창 후보자였던 그가 대통령 표창을 받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관 표창 실사 과정에서 그의 봉사 이력이 재평가를 받아 훈격이 격상된 것이다. 부모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던 그로서는 이룰 것은 다 이룬 듯한데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단다.

"빵으로 인천의 특산물을 만드는 것이 마지막 목표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극복한 제2의 고향 인천을 위해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에요."

명장은 자신의 정성으로 빚어낸 인천의 특산물을 찾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천으로 몰리는 날을 상상하는 듯했다.

글 임성훈 본지 편집장│사진 박재헌 포토저널리스트

태그:#최창진, #제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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