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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에서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소수가 시스템을 악용하면 다수가 피해를 볼 수 있다."
(2023년 11월, 혈세가 샌다며 '산재 카르텔 척결'을 내세운 정부)


"'엉터리 환자'를 가려내 그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제대로 사용하자는 것."
"이번 대책은 보호해야 할 산재환자를 더 확실히 보호하자는 취지."
(1998년 2월, 근로복지공단 보험급여국이 'IMF 체제 극복을 위한 고통 분담 대책-산재보험 급여 거품 제거 대책'을 배포하며)


기시감이 느껴진다. '환자'가 된 노동자들을 '가짜 환자'로, '세금 낭비자'로 낙인찍는 행태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윤 추구와 비용 절감을 내세우며 강한 노동강도로 노동자들을 내몰아 넣은 자본과 국가는 쏙 빠진 채, 노동자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행태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윤석열 정부에서 자주 등장한 '카르텔'이란 단어는, 산재 노동자/환자에게 가해져 왔던 '나일롱 환자'라는 공격이 변주된 형태다. 산재 인정률을 낮추려 하거나, 산재환자가 충분히 요양하지 못하게 하거나, '도덕적 해이' 등의 낙인 찍기로 일터의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는 꾸준했다.
 
1999년에도, 2007년에도, 지금도 산재노동자에 대한 공격은 여전하다. 
상단 : 2023년 11월 21일 진행된 "산재환자 모욕하는 윤석열 대통령 규탄 긴급 증언대회" 웹자보. 하단 왼쪽 : 1999년 이상관 노동자 자살 이후 산재환자 탄압하여 흑자회사를 내는 회사 규탄 집회. 하단 오른쪽 : 2007년 표만영 산재노동자 자살 이후 열린 근로복지공단 규탄 기자회견. 출처 : 노동건강연대.
 1999년에도, 2007년에도, 지금도 산재노동자에 대한 공격은 여전하다. 상단 : 2023년 11월 21일 진행된 "산재환자 모욕하는 윤석열 대통령 규탄 긴급 증언대회" 웹자보. 하단 왼쪽 : 1999년 이상관 노동자 자살 이후 산재환자 탄압하여 흑자회사를 내는 회사 규탄 집회. 하단 오른쪽 : 2007년 표만영 산재노동자 자살 이후 열린 근로복지공단 규탄 기자회견. 출처 : 노동건강연대.
ⓒ 오픈아카이브산재사망30주기, 노동건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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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주되어 반복되는 산재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공격

1998년, 근로복지공단은 IMF 고통 분담이란 명목으로 '급여 거품 제거' 대책을 발표했다. 산재보험료가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산재 노동자 치료를 제한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지사별로 요양 중인 산재 노동자를 5% 이상 '색출'하여 치료를 종결시키고, 재요양심사의 강도도 높였다. 입원환자를 통원 치료로 전환 조치해 이를 '경영평가'에 반영했다. 그렇게 '산재보험료'를 절감한 행위는 노동자에게 아픈 몸을 이끌고 일터로 복귀하라는 강요가 되어 제대로 쉬고 치료받을 권리를 박탈했다.

이는 노동자 자살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도 나타났다. 대우중공업에서 약 35kg의 장비를 옮기다 허리를 다쳐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공단과 사측으로부터 퇴원을 강요받다 1999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상관 노동자가 대표적이다. 요양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는커녕 강제로 치료를 종결하는 등 산재환자가 겪고 있는 심리적 고통을 방치한 결과, 유석상(2004년), 손창현 (2006년), 표만영(2007년) 노동자를 비롯해, 1999년부터 매년 10명 이상의 산재환자가 자살로 내몰렸다.

2002~2003년 대우조선, 한라공조, 두원정공 등 수많은 노동자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강화된 노동강도가 노동자들에게 근골격계질환을 유발했다는 점을 폭로하며 투쟁했다. 산재로 인정받아 잘 쉬기 위한 투쟁, 현장의 노동강도를 완화하려는 투쟁이 함께 일어났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를 비롯한 자본은 근골격계 직업병 인정 요건을 강화하려 했다. 그들은 '근로의욕 저하', '산재보험과 국민연금의 중복 급여 방지', '도덕적 해이' 등을 본격적으로 내세웠다.

경총 기업안전보건위원회는 2004년 결의문과 2005년 총회를 통해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노동계의 집단 공세에 편승한 직업병 판정이 남발"된다고 비난했다. 또한 "노동력 손실, 근로의욕 저하, 추가 비용 증가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라며, "요양급여와 휴업급여의 지급 시기 제한 명시화, 휴업급여 수준 하향 조정, 근골격계질환 인정기준 업무지침 강화 대책, 사업주의 산재심사청구권1) 신설" 등을 요구했다.

2004년 말 근로복지공단은 <근골격계질환 인정기준 처리 지침, 요양업무 처리 지침, 과격 집단민원 대응 지침>을 만들어 자본의 요구에 화답한다. 근골격계질환이 업무와 관련성이 있는지 5단계에 걸쳐 평가하고, 요양 연장 신청 처리 기간을 질질 끌겠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그 결과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산재 불승인율은 2002년 6.7%에서 2005년 18.1%, 2007년 25.9%, 2010년 39.8%로 급격히 증가했다.

산재를 인정받고 요양 중이던 노동자들을 '부정수급자'로 낙인찍으며, 이들에 대한 수사가 이뤄진 것은 2005년부터다. 2005년 3월, 울산지검은 전국 최초로 '엉터리 산재환자' 수사를 통해 4명을 구속하고 1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공단의 엄격해진 심사와 맞물린 결과, 울산에서 요양을 받는 산재환자는 3월 3221명에서 같은 해 6월 2880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근로복지공단이나 병원을 대상으로 한 감사도 이때부터 본격 진행되었다.

당시 한 신문에서는 (무려 조선일보다!) "어떻게 산재환자들을 산재 기금이나 파먹는 존재로 매도한단 말인가. (중략) 산재 보험이 부실화됐다면 부실 관리의 책임을 관리자에게 물어야 할 일이지 산재환자를 탓할 일은 아니다. 도마 위의 생선 요리하듯 마구잡이로 산재환자들을 칼질해선 안 된다"2)는 독자의견을 게재하기도 했다.

산재 노동자 원직 복귀나 충분한 요양을 도모하는 내용이 부재한 채, 2006년 12월 노사정 합의를 거쳐 산재보상보험법이 일부 개정되었다. 이후 "노동자들의 산재 대응은 더 개별화되었고, 일하다 병들고 다친 노동자 건강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더 늘어났다."3) 산재 환자에게 급여가 중복지급 되어 세금이 '낭비'되었다라거나, '나이롱 환자'의 행태에 병원도 가담하고 있다는 등의 모습을 띈 공격은 지속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일터의 유해 요인을 가리는, 질병·산재환자에 대한 낙인

경총 홈페이지에 접속해 '도덕적 해이'를 검색하면 무려 90건이 나온다. "도덕적 해이 가능성이 높은 도보, 자전거 등을 제외하되"(2015년 출퇴근재해 관련 입장), "반복적 실업급여 수급을 가능토록 하여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음"(2020년 특수고용노동자 고용보험 도입 관련 입장) 등 '노동자 개인의 문제'를 강조하고자 하는 기조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부의 '산재 카르텔' 공격이 한창이던 2023년 11월 20일, 경총은 "산재보험 질병 보상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다며 소음성 난청·직업성 암·근골격계질환·뇌심혈관계질환에 대한 업무상 질병 기준을 현행보다 높일 것을 제안했다. 기시감이 다시 드는 대목이다.

그들이 말하는 '도덕적 해이 없는 이상적인 근로자 개인'의 상은 강한 노동강도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직장의 생산에 누가 되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아픔을 숨기며 혼자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는 노동자로 하여금 '상시 일할 수 있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니도록 압박하며 서로의 고통을 비교하도록 만들고 '나일롱 환자'에 대한 낙인을 조장한다. '꾀병 환자는 있고, 적발되어 처벌받아야 한다', '내 동료 누구는 산재로 과하게 오래 쉰다', '내 동료 누구는 복귀 후 과하게 배려받는다' 등의 형태로 말이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그 자체로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작용해, 노동자 정신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저희는 나일롱이 아닙니다. 진짜 아픈 것입니다"4)라며, 아픔을 반복 증명하도록 하는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 낙인에 대한 두려움은 노동자 스스로를 위축시키기도 한다. 근골격계질환으로 산재를 승인받은 노동자들은 요양 중 "동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사회 활동을 스스로 제한하였다. 낙인 때문에 '환자 역할'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즐거운 곳에도 가지 않고, 술도 먹으면 안 되고, 운동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만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다."5) 노동자들의 아픔이나 질병을 제때 못 발견하게 함 역시 물론이다.

노동자의 아픔을 일터를 바꿀 계기로

노동자의 아픔을 의심하고 검열하며 '꾀병 부리지 않는 몸'을 강요하는 자본과 국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산재로 인정받은 노동자의 존재와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터의 아픔을 유발한 사업장의 규율도, 원직장으로의 복귀도 말하지 않는다. 더 잘 치료받고 요양하기 위해 보장해야 할 조건을 말하지 않는다. 노동관계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면서, 산재보험을 비롯한 사회보험의 더 넓은 적용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하다 아프거나 다친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치료를 진행하는 것은 사업주와 국가의 의무다.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이 박탈된 채, 팔 수 있는 것이라곤 자기 노동력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윤 때문에 안전보건 체계가 뒷전이 된 현장에서 빨리빨리 일하다 죽거나 다친 결과가 산재기 때문이다.

2022년 한해에만 일하다 사고로 10만7214 명이, 업무상 질병으로 2만3134명이 산재 승인을 받았다. 산재 인정 건수가 이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 때문에 아프다 다치는 것일까. 일터의 위험 요인을 없애고 노동자들이 아픔을 잘 치료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낙인 찍기가 아니다. '아픈 몸'이, 다양한 몸이 일할 수 있는 일터가 되도록 노동자들이 집단적 투쟁에 나서 새로운 기준을 세울 때다.

1) 공단의 산재 승인에 대해 사업주가 이의 제기할 수 있는 권리
2) 이춘만. [초점] 산재환자 특혜 아닌 정당한 보험금을 악덕·나이론 환자로 매도해. 2005.06.15. 조선일보.
3) 정진주 외 지음. 사회건강연구소 기획. "결국 사람을 위하여". 소이연. 2017
4) 산재환자 모욕하는 윤석열 대통령 규탄 긴급 증언대회 '나는 나일롱환자가 아니다' 2023.11.21
5)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2013년 두원정공 근골격계 유해요인조사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조건희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4년 1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산재환자낙인찍기안돼, #제대로치료받을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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