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소송 원고인 이경자(고 최정례 조카며느리)씨가 28일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쓴 친필 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소송 원고인 이경자(고 최정례 조카며느리)씨가 28일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쓴 친필 글.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관련사진보기

 
"8년 7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재판을 한다고 하니 감개무량합니다."

28일 오전 8시께 이경자(80)씨는 삐뚤빼뚤하지만 꼼꼼히 눌러쓴 두 장짜리 글을 품은 채 서둘러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나주에서 출발해 서울의 대법원으로 향하는 길. 몸이 불편한 중에도 기꺼이 집을 나선 이씨는 "어제 밤 한 숨도 못 잤어. 어떻게 될란가 싶고, 혹시 기자들이 뭐 물어보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쓰까 싶기도 하고"라며 되뇌었다.

이씨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최정례의 조카며느리이자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원고다. 2015년 5월 또 다른 피해자 김영옥 할머니(91)와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씨는 이날 오전 11시 대법원으로부터 8년 7개월 만에 승소 확정 판결을 들을 수 있었다. 연로한 김 할머니는 대법원 선고 현장에 함께하지 못했다.

1944년 5월 근로정신대로 일본 미쓰비스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강제동원된 고 최정례는 같은 해 12월 도난카이 대지진으로 목숨을 잃었다. 조카며느리인 이씨는 결혼 후 시할머니가 자신이 혼수로 해 온 이불을 덮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가 시할머니가 딸(고 최정례)을 잃었다는 사연을 접했다. 이후 시할머니 유언에 따라 명절 때마다 고 최정례의 제삿밥을 차려온 이씨는 2015년 소송에도 나섰다.
 
나는 고모님(고 최정례)을 본 적도 없고 시집을 와서 할머님을 모셨는데 겨울에 눈이 오고 고드름이 얼었을 때도, 그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님은 이불을 덮지 않고 생활하셨습니다. 혹시나 내가 해온 이불이 맘에 안 들어 덮지 않으신 걸로 착각했습니다. 사연인즉 (할머님은) 딸이 도난카이 지진 때 돌아가셔서 화로 열이 올라 이불을 덮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이불 없이 주무시는 할머님을 보면서 자식이 무엇인지 (느꼈습니다).
- 이씨의 친필(기사 하단 전문 첨부)
 
이날 이씨와 함께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은 김영옥 할머니 역시 1944년 5월 근로정신대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강제동원됐다. 전쟁터와 다르지 않았던 곳에서 임금도 받지 못한 채 사실상 감금 생활을 했던 김 할머니는 광복 이후 귀국해서도 자신을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한 시선 때문에 "아들한테도 오랫동안 일본에 다녀온 사실을 털어 놓지 못"할 정도로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김 할머니는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을 통해 "미쓰비시가 몇 십억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분이 풀릴 수 있겠나. 어떤 것으로도 내 잃어버린 삶을 보상 받을 수 없다. 죽기 전에 미쓰비시로부터 꼭 사죄와 배상을 받고 싶다"고 전했다.

징용공 14명 및 유족도 승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소송 원고인 이경자(고 최정례 조카며느리)씨가 28일 대법원의 승소 판결 후 취재진 앞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소송 원고인 이경자(고 최정례 조카며느리)씨가 28일 대법원의 승소 판결 후 취재진 앞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관련사진보기

 
승소 직후 이씨는 대법원에서 기다리던 취재진 앞에 섰다. 떨리는 목소리로 "솜털도 안 가신 사람을 죽여놓고 일본은 사죄 한 번 없다. 기가 막힌다"고 말한 이씨는 "일본은 각성하고 미쓰비시는 이른 시일 내에 배상하고 사죄하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시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차례 지내고 남은 음식으로 밥 한 그릇, 국 한그릇만 차려서 (딸인 고 최점례를) 기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 뜻을 헤아려 보라"며 울먹였다. 

이날 대법원은 이씨와 김 할머니뿐만 아니라 강제동원 징용공 피해자 14명과 유족들의 손도 들어줬다. 2013년 7월 소송 제기 당시에 피해자 14명 중 13명은 이미 사망했고 유일한 생존자였던 1명도 2015년 3월 사망해 이날 승소 소식을 듣지 못했다.

고 홍순의. 고 박남순. 고 김인철. 고 김민경. 고 강건형. 고 배상훈. 고 장관수.고 신진우. 고 김용복. 고 최창희. 고 최기춘. 고 황규호. 고 이상엽. 고 방우식.

1919~1923년생인 이들은 1944년 8·9월 평택·용인에 거주하던 중 징용장을 받고 용광로, 주물공장 등이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기계제작소로 강제동원됐다. 이들은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공장, 기숙사, 방공호 등에 머물다 피폭 및 부상을 당한 채 방치됐고 이후 자력으로 귀국했다.

피해자들은 1995·1996·1998년에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2007년 최종 패소했고, 2013년 7월 한국 법원에 다시 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대법원 선고로 소송 마무리까지 10년이 걸렸다.

한편 대법원은 일주일 전인 지난 21일 또 다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도 똑같이 원고 승소 판결했다(관련기사 : 10년 재판 이겼지만 법정엔 망자 이름만... "눈도 제대로 못 감으셔" https://omn.kr/26u46). 지난 2018년에도 대법원은 같은 판결을 내렸다(관련기사 : 양금덕 할머니 승소 5년..."대법원, 미쓰비시 자산 강제 매각 즉시 명령하라" https://omn.kr/26kqq).

이날 소송은 위 두 소송에 이어 대법원 선고가 내려져 '3차 소송'으로 불린다. 아래는 이경자씨가 쓴 친필 글의 전문이다. 
 
2018년 광주고등법원에서 승소한 고 최정례 사건 원고 (조카며느리) 이경자입니다. 당신들은 불쌍하지도 않겠지만 (제 시댁 할머니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딸을 (잃은), 한국도 아닌 일본 땅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고 최정례의 유가족입니다.

죽은 자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만,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소송을 제기한 원고입니다. (2015년 5월 소송 제기 후) 8년 7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재판을 한다고 하니 감개무량합니다.

학교에 보내준다고, 일본의 좋은 학교에 보내준다고 속여서 데려가 놓고 학교는 정작 보내주지 않고 비행기 만드는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때는 너희들 세상이었기 때문에 너희들 맘대로 했지. 너희들은 어린 소녀만 죽인 게 아니고 할머니의 목숨까지 단축시켰습니다. 그런 할머니를 모신 저로서는 재판을 하게 됐고 오늘에야 대법원에 오게 됐습니다.

초혼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할머니는 내 손을 잡으시며 울먹이는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차례 지내고 남은 음식 장만하지 말고 소쿠리에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만 차려주면 좋겠다' 하시며 말씀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사랑한 딸을 그리시며 딸을 떠나보낸 비탄과 절망감을 (말씀하셨고) '내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미쓰비시는 사죄하고 일본은 사죄하고 배상하는 것이 옳은 길이다.

(저는) 1944년 도난카이 지진에서 사망한 고 최정례 고모님의 유족(조카며느리)입니다. 나는 고모님을 본 적도 없고 시집을 와서 할머님을 모셨는데 겨울에 눈이 오고 고드름이 얼었을 때도, 그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님은 이불을 덮지 않고 생활하셨습니다.

혹시나 내가 해온 이불이 맘에 안 들어 덮지 않으신 걸로 착각했습니다. 사연인즉 (할머님은) 딸이 도난카이 지진 때 돌아가셔서 화로 열이 올라 이불을 덮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이불 없이 주무시는 할머님을 보면서 자식이 무엇인지 (느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희들이 고 최정례 고모님의 영혼이나마 기도하며 정중히 사죄하길 부탁한다. 이 말 뿐이다. 역지사지를 생각해보라.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딸을 죽게 한 일본 정부는 사죄하고 미쓰비시는 각성하라.

2023년 12월 28일 원고 이경자

태그:#강제동원, #대법원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선악의 저편을 바라봅니다. extremes88@ohmynews.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