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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남효온(南孝溫)은 1454년 서울에서 생원인 남전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5대조는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재이고, 외증조부 역시 영의정을 지낸 이원이다. 출신성분으로 보면 개국공신의 후예로서 어김없는 금수저를 물고 출생한 것이다.

남효온은 추강(秋江)이라는 자호에서 보이듯이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권도를 넘나드는 출세주의자가 아니었다. 추강, 차고 맑은 가을의 강물, 남효온의 생애는 아호에 담긴 그대로였다. 다른 하나의 호는 행우(杏雨)이다. 은행나무에 내리는 비, 역시 비장감이 서린다.

영민하고 출신가문이 좋은 그가 단종의 생모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건의하는 상소를 하고, 세조에게 무참하게 참살당한 사육신의 전기를 썼다면 그의 인물됨과 사려의 깊이에서 평탄하지 못한 삶의 역정을 보여준다. 공정하다고 할 수 없는 연산군 시대 사관의 기록이다.

남효온은 젊어서부터 글을 읽어 큰 뜻이 있었다. 성종조에 글을 올려 일을 말했다가 기휘(忌諱)하는 바에 저촉되어 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자 스스로 그 뜻을 세상에 행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방일하여 얽매이지 않아 시속과 더불어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노자와 장자의 고허한 의론을 본받아 혜강(嵇康)·완적(阮籍)의 방달한 행동을 하였다. 문장을 지음에 역시 초매하여 고체(固滯)한 누습이 없었으며, 더욱이 시에 능하여 당나라 시인의 풍격이 있었다.

그러나 세속의 세태에 격분하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이단이 되어 죽음에 이르도록 깨닫지 못했으니, 진실로 우리 도의 죄인이라 하겠다. (<연산군 일기> 1498년 8월 16일자)

여기에 나오는 혜강과 완적은 중국 고사 죽림칠현에 나오는 절의의 인물들이다. 연산군 시대의 사관이 남효온을 '죄인'이라 기술하면서도, 혜강·완적에 비할 정도로 그는 절의 있는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후세에 생육신으로 추앙받은 사유가 있었다.

남효온은 어릴적에 서울 낙선방에서 공부하고 흥천사에서 일암 스님에게서 배웠다. 이어서 선비 김수온에게 시를 배우고 33살 때에는 당대의 학자 김종직을 만나 사제관계를 맺었다. 김종직은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부관참시를 당한 조선유학의 거두이다. 이런 인물들을 찾아 배우고 교유한 청년 남효온의 범상하지 않음을 보게 한다.

18살을 전후하여 성균관에 입문하여 강응정·박연·정여창 등과 소학계를 맺고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가까운 벗들과 한강 주변을 누비면서 분방한 청년기를 보내었다.

남효온은 20살 이후 추강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일에 관심을 보였다. 25살이 되던 1478년(성종 9) 4월 15일 느닷없이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다. 요즘 중국에서 날라온 황사와 비슷한 현상이었지만, 당시에는 큰 이변 또는 변괴로 인식되었다. 성종은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하면서 전국의 선비들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추강은 그동안 생각해온 대로 단종의 어머니 소릉의 복원을 청하는 등 8개조로 이루어진 상소를 올렸다.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켜 단종을 폐위했다가 죽이면서 그의 생모도 서인으로 강등되어 묘(소릉)가 종묘와 능묘에서 내쳐졌다. 추강의 상소는 이것을 복원하라는 내용이었다. 1478년이면 세조가 죽은 지 10년밖에 안되는 시점이다.

추강의 상소는 집권세력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으나, 임금이 구언을 청하여 올린 상소를 공개적으로 단죄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추강은 골수 훈구파에게 '찍히게' 되었다.

추강은 이후 관직에 나가는 길을 포기하고 <육신전(六臣傳)>의 집필에 나섰다. 육신이란 단종의 복위를 시도하다가 변절자의 밀고로 능지처참을 당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를 일컫는다.

사육신은 조선왕조에서는 반역자의 무리에 속한다. 1456년 6월에 육신이 처형되었으니, 추강이 이들의 전기집필을 시작한 때는 불과 25년이 경과한 시점이다. 세조의 아들이 왕이고, 계유정란의 공신과 그 후예들이 권좌에 앉아 있었다. 추강의 <육신전> 집필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위험천만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그는 소릉복원의 상소건으로 훈구파에게 찍혀 있는 처지였다.

추강은 여러 해 동안 많은 자료를 모으고 관련자들을 만난 증언을 토대로 <육신전>을 집필했다. <육신전> 외에도 계유정란 때 세조를 따르지 않았던 허후(許詡)의 전(傳)도 별도로 저술하였다. 그 때에 추강이 아니었으면 사육신의 고결한 행적은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추강은 6신의 전기를 한 사람씩 기록한 다음 마지막에 찬(贊)을 붙이는 방식으로 이들의 평전을 썼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평전 쓰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반체제 인사들의 '절의록' 또는 '충신록'을 쓴 추강의 삶은 고달팠다. 사귀던 벗들이 하나씩 떠나고 생계는 나날이 궁핍해졌다. 어린 아들이 굶다시피하다 죽었다. 산에 오르는 날이 많아지고 술도 자주마셨다. 남산 기슭에서 과음으로 실수한 뒤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주잠(酒箴)>에서 담았다. 시의 뒷 부문이다.

술의 재앙을 모르는 바 아니건만
돌아보니 스스로 엿처럼 달게 마시네
술 취한 가무는 <서경>에서 경계했고
술 마시고 뉘우침은 <시경>에 실려 있네
양웅은 일찍이 주잠을 지었고
백유는 술 때문에 죽었다네
어찌할거나 이러한 미친 약
덕을 잃음은 항상 이것에 달렸다네
<주고>편이 <서경>에 있으니
마땅히 유념하여 법규로 삼으리라.


추강은 김시습과 자주 어울렸다. 불의의 시대에 의인끼리 어울리지 않으면 누구와 말 상대를 하고 몇 잔 술에 회포를 풀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은 열 아홉의 나이 차이가 있었으나 뜻을 같이 하는 망년지우였다.

추강은 경기도 행주에 은거하여 농사를 짓기도 하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등 행운유수의 삶을 보내었다. 36살이 되던 해 자기보다 스무살이나 많은 공조판서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에게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만시(自挽詩)> 4수를 지어 보내었다. 고대로 자신의 만장 시를 쓴 사람은 흔치 않았다. 제2수 앞 부문을 소개한다.

인생은 아침 이슬 마르듯이 잠깐인데
해와 달은 머리 위로 쏜살같이 지나가네
천 년 뒤 학이 되어 망주석에 앉아 보니
모두 죽어 무덤만 요동 성곽에 즐비하네
쉼 없이 흘러가는 나그네 인생길
그 누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으랴.


추강은 39살이 되던 1492년 긴 방랑 끝에 짧은 생을 접었다. 의인의 삶은 죽음으로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눈을 감은 지 12년이 지난 1504년 연산군이 등극하고 생모인 폐비 윤씨의 일을 빌미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이 와중에 추강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소릉복원'과 <육신전> 등에 대한 보복이었다.

역사는 무심하지 않아서 1506년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84년에는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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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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