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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국정개혁을 시도하다가 역모로 몰려 참사를 당한 인물은 대표적으로 조광조·정여립·허균·김옥균 등이 꼽힌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 조정은 서인과 동인 세력간의 치열한 붕당싸움으로 여념이 없었다. 당시 정권은 정여립이 속한 동인이 잡고 있었다. 원래 정여립은 서인 계통이었으나 식년 문과에 급제한 뒤 수찬 벼슬에 제수되면서 집권세력인 동인편에 반부(反附)하였다. 정여립의 비극의 씨앗은 여기서부터 발아한다.

정여립(鄭汝立, ?~1589)처럼 사후 4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역과 무고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한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반역이냐 무고의 희생자냐의 정답은 제쳐 두고라도 정여립이 역모로 몰려 죽고 '관련자'들이 체포·처형되고, 혐의자들에 대한 토벌이 시작되면서 1천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를 기축옥사(己丑獄死)라 부르는 것은, 기축년에 일어난 옥사인 까닭이다.

이 옥사로 인해 전라도는 평안도·함경도 등 서북지방처럼 반역향의 낙인이 찍히게 되고,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이 어렵게 되었으며 지역차별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기축옥사에 대해 <선조수정실록> 등 많은 관변의 기록은 하나같이 정여립을 무도한 패륜아·반란수괴로 그렸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정사)의 한계는 이 사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선조수정실록> <권23 선조22년 10월조>는 정여립의 '죄상'을 이렇게 쓰고 있다.

"여립이 자주 선조의 꾸지람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전주와 금구·진안·별장 사이를 내왕하며 소일하고 있었으므로 조정에서 이를 애석히 여겨……서로 뒤를 이어 여립이 이처럼 좌절과 억제가 심하게 되자 모반을 계획하고는 강학(講學)을 가탁(假託)하고 무뢰한들을 불러모았는데 그 중에는 무사와 승도들도 끼여 있었다. 당시 나라는 군정이 문란하고 재력이 쇠진한 데다가 매년 흉년까지 들어 도적들이 횡행하고, 백성들은 군정의 문란으로 괴로워했으며, 북계쇄민(北界刷民)으로 인해 동요마저 있었으므로 여립은 백성들에게 난을 일으킬 마음이 있음을 알고 그의 무리들과 모반을 결의하게 되었다."

동인 타도의 기회를 노리던 서인들은 정여립의 범상치 않은 행동과 몇 가지 참설(讖說)을 이유로 그에게 역모 혐의를 씌웠다.

서인들이 내세운 참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초 이래로 전해 온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奠邑興) 즉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참설을 정여립이 요승 의연(義衍)과 모의하여 이를 옥판에 새겨 지리산 석굴에 숨겨 두고, 산놀이를 빙자하여 지리산에 가서 옥판을 찾아 무리들에게 보였다.

둘째, 승 의연이 황기가 전주 동문 밖에 있다고 꾸며 전주 왕기설(王氣說)을 퍼뜨렸다.

셋째, "뽕나무에 말(馬) 갈기가 나면 그 집 주인이 왕이 된다"는 참요가 있었는데 정여립이 의연과 몰래 여립의 정원에 있는 뽕나무 껍질을 벗기고 말 갈기를 끼워 두었다가 뽕나무 껍질이 서로 붙게 되자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누설하지 못하게 했다.

넷째, 국초 이래로 계룡산 개태사지(開泰寺沚)가 이씨 왕조의 뒤를 이을 정씨 왕조의 도읍지라는 참설이 있었는데 여립이 계룡산 폐사의 벽에 "무기연간(戊己年間)에 형운(亨運)이 열릴 것"이란 글을 써 붙였다는 것이 이른바 '참설'의 내용이었다.

이밖에도 정여립이 만든 대동계(大同契)가 모반을 위한 무력 양성의 조직으로 고발되었다.

주요한 역모의 증거로 제시된 대동계는 정여립이 전주·금구·태인 등 이웃 고을의 여러 무사들과 공·사천의 노비 등 계급의 상하에 걸쳐 계를 조직하고, 매월 향사회(鄕射會)를 열어 주연을 마련하여 즐기면서 무술을 익혔다고 한다.

대동계는 1587년(선조 20) 전라도에 왜구가 침략해 왔을 때, 전주 부윤 남언경이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대동계원인 무사들을 신속히 동원하여 왜구를 물리쳐 정여립의 명성을 높였는데, 나중에 이 대동계가 역모를 위한 조직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의 호를 거점(去點)이라 지었는데, "옥(玉) 자에서 점을 지우면 곧 왕(王)이 되는" 것으로 보아 역모가 틀림없다는 '혐의'까지 제기되었다.

정여립의 인물됨은 그가 율곡과 성혼의 각별한 우호와 촉망을 받았던 데서도 나타난다. 바른말을 잘하고 강직했던 까닭에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고향 전주로 낙향했지만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을 만큼 인망과 영향력이 높았던 인물이다.
정여립은 일찍부터 왜구의 내침을 예상하여 향리의 장정들에게 활 쏘고 창 쓰는 연습을 시키고,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하였을 때에는 전주 부윤의 요청에 따라 대동계원을 동원하여 일거에 왜구를 물리쳐 큰 공을 세웠다.

오매불망 동인세력의 타도를 노리던 서인세력에게 정여립의 존재는 그럴수록 제거의 표적이 되었다. 서인의 대부 정철(鄭澈)의 주도에 따라 황해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인옹 등의 연명으로 고변이 이루어졌다.

소식을 전해 들은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결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역모는 하나의 부정하지 못할 엄연한 사실처럼 단정되었다. 그의 '자살'을 둘러싸고 숱한 의문이 따른다. 정철 측의 선전관 등이 죽이고서는 자살한 것처럼 꾸민 것으로 <동소만록(桐巢漫錄)>은 전한다.

몇 가지 의문점을 들어보자.

첫째, 정여립이 고변의 소식을 듣고 도망을 갔다면 왜 지리산과 같은 깊은 산 속이 아닌 낙도로 피신했을까.

둘째, 모반의 산실이 전주이니 전라도에서 역모 진행이 더욱 완연했을 터인데 어째서 전라관찰사나 전주부윤 및 관헌의 눈에는 띄지 않고 멀리 해서(海西) 지방의 벽지에서 먼저 탐지되어 고변했는가.

셋째, 모반이 사실이고 양병까지 하였다면 단 한 차례의 항거도 하지 않고 맥없이 도주하여 자결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구를 격퇴할 정도의 부대를 동원할 수 있을 만큼 조직화된 세력의 기반을 가졌다면, 왜 그처럼 무력하게 패주하였는가.

절대왕조에서 정여립의 신념체계는 위험성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는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들어 "천하(임금)는 공물인데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며,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의 통론이 아니다"라는 가히 '혁명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왕통(王統)에 따르는 계승이 아니라 누구든 능력이 있는 자에게 왕위가 전해져야 한다는 요순우(堯舜禹)의 선양방식을 이상적인 왕위계승 방식으로 강조한 선각적 사상가였다. 정여립에 관한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자.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사마공(司馬公)이 자치통감에서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이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이를 부인하고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삼았는데 후생(後生)으로서는 대현(大賢)의 소견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요, 순, 우가 임금의 자리를 서로 전했는데 그들은 성인이 아닌가.

또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한것은 왕촉이 죽을 때에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해(柳下惠)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는 성인 중의 화(和)한 자가 아닌가. 맹자가 제나라, 양나라의 임금에게 천자가 될 수 있는 왕도정치를 권하였는데 그는 성인 다음 가는 사람이 아닌가.

여립의 이와 같은 폐역스런 말은 매우 많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열복하고 그의 제자인 조유직·신여성 등에 이르러서는 이르는 곳마다 과장해서 말하길 우리 선생의 이와 같은 논의는 실로 고금의 선현들이 아직까지 말하지 못하였던 것이라 하겠다.(<기축기사(己丑記事)>)

정여립의 이와 같은 천하위공(天下爲公) 사상은 약 230년 후 다산 정약용에 의해 '탕론(蕩論)'으로 이어진다. 다산은 이 글에서 군주는 간접선거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고 근대적 선거사상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후일 신채호는 정여립의 혁명사상이 "4백 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 평한 바 있다. 이러한 '혁명성'이 그를 반역아로 몰아 처참한 좌절의 생애를 마치게 했던 것이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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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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