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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파발 금성당 (사진 : 정민구 기자)
구파발 금성당 (사진 : 정민구 기자) ⓒ 은평시민신문

꼭두새벽 정성스레 떠온 맑은 정화수로 치성을 드리며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옛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실제 그 모습을 본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그 장면을 상상하는 일이 어렵지 않은 건 우리 민족의 오랜 문화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힘을 빌어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하면서 이 땅의 민중들은 현세의 복과 무탈을 기원하는 의식을 이어왔다. 그렇게 무속은 마을에 기쁜 일, 슬픈 일이 있을 때 함께 모여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 공간에 늘 함께 하며 민중들을 위로하며 힘이 돼 주었다. 

근대화 바람 속에 공동체의 기원과 안녕을 기원하는 무속신앙이 많이 사라지고 그 기록과 흔적을 찾고 지키는 일 또한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 은평구 구파발 금성당이 개발 바람 속에서도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일은 소중하다. 

구파발 금성당은 19세기 후반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의 많은 신당이 사라진 지금 옛 신당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건축적 가치를 지닌다. 금성당에서는 옛 전통을 이어받아 매년 봄가을 금성당제를 열고 이말산에 묻힌 궁인을 추모하고 나라의 태평성대와 지역민의 대동단결을 축원하고 있다. 

금성당이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양종승 박사다. 그는 반 무당 소리를 듣는 무속학자다. 어린 시절 동네 마을굿을 구경하며 갖게 된 호기심이 그를 결국 무속학자로 이끌었다.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큰 무당' 우옥주 선생과 박동신 선생의 집에 기거하며 무속을 배우기도 했고 이후 무속을 이론적으로 연구해 양지로 이끌겠다는 생각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금성당, 철거 위기 이겨내고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양종승 샤머니즘 박물관 관장 (사진 : 정민구 기자)
양종승 샤머니즘 박물관 관장 (사진 : 정민구 기자) ⓒ 은평시민신문

양종승 박사는 1994년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민속과 문화정책 : 한국의 무형문화재와 인간문화재>로 박사학위를 받고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한국무속학회 회장, 문화재청 국가무형문화재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등을 역임했다.

양종승 박사가 금성당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건 1970년대다. 일 년에 한두 번 금성당을 찾았는데 아쉽게도 이미 그 때 본당의 무신도가 많이 도난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양 박사에 따르면 구파발 금성당에는 16점의 신도가 있었고 1970년대 중반 이중 8점을 도난당했다고 한다.

도난당한 자료 중에는 금성대왕 신도가 포함돼 있는데 지금 금성당에 있는 금성대왕 신도는 양종승 박사가 1972년 경기대 장주근 교수가 촬영한 사진자료를 근거로 2016년 복원해 낸 것이다.  

양 박사에 따르면, 금성당 시봉자 송은영(1925~2017) 할머니가 전하길 도난당한 금성대왕 영정이 300년 훨씬 넘었다고 하고 당시 화상을 그리고 위해 중국에서 물감을 들여왔다는 말을 그녀의 시할머니한테 들었다고 한다.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일하던 시기, 금성당이 곧 철거될 것이라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양종승 박사는 곧장 금성당으로 달려갔다. 당장이라도 철거 될 분위기였고 이것저것 따지고 잴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백방으로 금성당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금성당이 중요한 이유는 고려에 이어 조선 왕실에서도 제물과 제문을 내려 국태민안을 기원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나서 마을굿을 펼친 당은 많이 남아있지만 왕실의 지원을 받은 곳은 드물었다. 이미 노들(망원), 각심절(월계동)의 금성당은 개발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뒤였다. 구파발 금성당도 윗금성과 아랫금성 두 곳이 있었지만 윗금성은 1970년대 사라지고 지금은 아랫금성당 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구파발 금성당 (사진 : 정민구 기자)
구파발 금성당 (사진 : 정민구 기자) ⓒ 은평시민신문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문화재청은 일단 철거를 중지시키고 문화재 지표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문화재 지표조사를 맡은 상명대학교는 '금성당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거나 그 자체를 해체해도 된다'는 판정을 내려 철거 위기에 직면했다. 미디어에서 금성당의 보존 중요성을 제기하고 문화재청에서는 시행사은 SH공사에 재조사 지시를 내렸다. 

양종승 박사는 "금성당을 옮기는 일은 곧 문화재를 파괴하는 일이고 의미도 없다. 당시 SH에서 더 넓은 부지를 주겠다고 했지만 중앙정부에서 관여했던 당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금성당"이라며 "이미 금성당 두 곳 없어지고 국사당, 사신성황당, 할미당, 노고당 등 국가에서 관리하던 당이 다 없어진 상황에서 금성당은 꼭 지킬 필요가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결국 양종승 박사를 단장으로 한 구파발 금성당 문화재지표조사단이 새로 꾸려졌고 금성당은 원래 위치에 존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따라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개발업체와 조사단 간의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금성당 이전은 중단되고 은평뉴타운 아파트 건축 도면이 변경됐다. 자칫 금성당이 사라질 뻔한 순간이었다. 

금성당 철거와 이전 위기는 가까스로 넘겼지만 풀어야 할 숙제는 많았다. 문화재 지정은 아직 되지 않은 상태였고 은평뉴타운 재개발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애쓴 끝에 2008년 7월 대한민국 국가민속문화재 제258호 금성당으로 지정됐다. 

문화재 지정은 됐지만 이미 그 때는 은평뉴타운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양종승 박사는 "만약 금성당이 먼저 문화재로 지정이 됐더라면 아파트와의 거리도 확보되고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개발을 추진하는 입장에서 800평 가량의 금성당 부지를 쉽게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샤머니즘 박물관, 금성당으로 이전
 
 샤머니즘 박물관 소개 (사진 : 정민구 기자)
샤머니즘 박물관 소개 (사진 : 정민구 기자) ⓒ 은평시민신문

2013년 국립민속박물관을 퇴직한 양종승 박사는 퇴직금을 털어 정릉 자택에 샤머니즘 박물관을 열었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성북구에 샤머니즘박물관, 성북당의 맹인독경, 사라져가는 점집들을 묶어 민속 마을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갖고 양 박사의 도움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경문(經文)을 읽으며 복을 비는 전통신앙의례인 맹인독경을 발굴해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도록 기여하는 등 무속학 분야에서 양종승 박사의 활약은 빛났기 때문이다.  

그때 은평구청에서 양종승 박사를 찾아가 금성당 운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했다. 매년 충분한 예산을 확보할 테니 금성당을 제대로 운영해 달라는 요구였다. 양 박사는 서울시와 이야기를 진행 중인 것도 있고 금성당을 지켜내는 과정에서 힘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거절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은평구청은 이만한 적임자를 찾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삼고초려 끝에 양 박사를 설득해내는 데 성공했다. 

성북구 정릉동에 있던 샤머니즘박물관이 지금의 금성당에서 새롭게 이전, 개관된 건 2016년의 일이다. 2016년 4월 은평구청과 '샤머니즘박물관 업무협약서'를 체결하고 같은 해 5월 샤머니즘 박물관을 금성당으로 이전하고 개관식을 진행했다. 샤머니즘 박물관에는 양종승 박사가 평생 수집한 샤먼유물 및 장서를 비롯한 영상, 사진, 녹음, 행사자료 등 약3만여 점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금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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