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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를 떠나 잠시 벵갈루루를 거쳐, 저는 더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벵갈루루에서 하룻밤 기차를 타고 도착한 도시는 케랄라 주의 코치입니다.

기차에서 내려 숙소까지 잠시 걸었습니다. 기차역 주변에는 늘 그렇듯 허름한 상점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제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으레 힌두교 신이나 구루의 사진이 걸려 있어야 할 가게 한 켠에, 예수님을 그린 성화가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는 소고기 커리를 팔고 있습니다. 다른 도시에서도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파는 곳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만큼 흔하게 볼 수는 없었습니다. 코치에 도착하고 금세 느꼈습니다. 이곳은 인도에서도 아주 특별한, 케랄라 주라는 것을요.
 
소고기가 들어간 비리야니
 소고기가 들어간 비리야니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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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랄라 주는 오래 전부터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곳입니다. 아랍 상인과도, 중국 상인과도 교역하던 인도양의 무역 기지였죠. 북부에는 캘리컷, 중부에는 코친, 남부에는 트라반코르가 서로 경쟁하며 무역항으로 번성했습니다.

그런 만큼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침입도 가장 먼저 받은 곳이었습니다. 1500년에 처음으로 포르투갈이 진출했죠. 포르투갈 출신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사망한 곳이 바로 이곳 코치입니다. 이후 코치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거쳐 영국령에 편입됩니다.
 
포트 코친의 거리
 포트 코친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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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덕에, 케랄라는 인도 안에서도 독특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코치의 인구 중 힌두교도는 44% 수준으로 절반이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도가 38%, 무슬림이 18% 정도를 차지하고 있죠.

기독교 인구가 많은 것도 역사적인 영향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 이후 사도 토마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동방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사도 토마스가 향한 동방은 곧 인도였고, 그는 인도 첸나이에서 순교합니다. 케랄라 지역 역시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만큼, 사도 토마스의 선교에 의해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확산된 것은 페르시아와의 무역이 활발해진 4세기부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이 시기에 즈음에야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죠. 그러니 케랄라 기독교의 역사는 유럽 기독교의 역사보다 깊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서구 열강의 진입 이후에도 기독교는 계속 확산되었습니다.

제가 기차역 앞에서 예수님의 성화를 걸어 둔 가게를 본 것도 우연은 아닌 셈입니다. 코치 인구의 3분의 1은 기독교인이고, 그 역사도 아주 깊으니까요. 곳곳에서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식재료에 큰 제약이 없는 기독교인이 많은 영향입니다.
 
바스코 다 가마가 묻혔던 성 프란시스 성당
 바스코 다 가마가 묻혔던 성 프란시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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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뿐만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도 케랄라는 독특하죠. 케랄라에서는 1957년 공산당이 선거를 통해 주 정부를 장악합니다. 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지방정부를 장악한 것은 세계 최초였습니다. 여전히 공산주의 세력은 선거보다 혁명을 통한 집권을 말하던 시대였으니까요.

물론 중앙정부의 탄압이 이어졌죠. 하지만 성평등, 노동권 증진, 사회의 탈종교화, 생산수단의 사회화 등 공산당이 주장한 의제는 케랄라 사회에 분명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진보정당인 공산당과 민주/개혁파 정당인 국민의회가 번갈아 집권을 이어간 케랄라는 인도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역으로 성장했죠.

특히 의료 정책과 교육 정책에서 케랄라 주는 큰 성과를 보였습니다. 평균 문해율이 70% 선인 인도에서 케랄라 주의 문해율은 90%를 넘습니다. 2011년 인도 인간 개발 보고서(Human Development Report)에 따르면, 케랄라 주민의 기대 수명은 74세로 인도에서 가장 높았습니다. 여성의 인구가 비정상적으로 적은 인도에서, 케랄라만큼은 남성 1,000명당 여성 1,084명이라는 높은 성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케랄라 모델'은 그 자체로 연구의 대상이었습니다. 실제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야 센(Amartya Sen)의 주된 연구 주제이기도 했죠. 경제 지표는 높다고 할 수 없지만, 기대수명이나 문해율 등에서는 선진국에 준하는 성적을 내는 케랄라 주는 분명 독특했습니다.
 
코치에 걸린 공산당기
 코치에 걸린 공산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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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케랄라 모델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도 있습니다. 교육수준에 비해 높은 실업률과 낮은 여성의 경제 참여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죠. 의료 정책 역시 급속한 고령화와 함께 효과를 잃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습니다. 모디 총리의 집권 이후에는 케랄라와는 반대로 복지보다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구자라트 모델'이 주목받기도 했죠.

특히 '케랄라 모델'의 성공이 이민자의 송금에 기대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아랍 지역으로 이주한 케랄라 출신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송금하는 돈이 케랄라 모델의 성공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제 지표의 성장 없이도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한 케랄라 모델은 허상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민자의 송금 자체가 케랄라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인도 사회는 전반적으로 이주를 꺼리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무역 도시로 성장한 케랄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케랄라 모델'을 그 역사적인 경험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용어로 사용한다면, 이 송금 경제조차도 인도의 여러 지역과는 다른 '케랄라 모델'의 일부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코치의 항구
 코치의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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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결론을 낼 수 있는 일은 아니겠죠. 어찌 생각하면 "성장이냐, 분배냐"라는 오래된 문제를 단지 장소를 옮겨 반복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고요.

저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벵갈루루에 있다가 코치로 넘어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이 도시의 가난이 눈에 띄었습니다. 결국 성장이 없다면 분배가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의문했습니다.

하지만 아침이면 교복을 입고 버스에 오르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띕니다. 우리가 성장을 이유로 유예해 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회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얻는 성장은 무슨 의미일까 의문했습니다.
 
구시가에 그려진 체 게바라
 구시가에 그려진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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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랄라는 인도의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볼수록 우리가 아는 인도와는 달랐습니다. 종교의 영향력은 작았습니다. 소고기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상상하는 인도와는 다르죠. 가파르게 성장하는 인도 사회에서, 성장보다는 분배를 외치는 지방정부의 모습도 독특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인도와는 달랐습니다.

저는 겨우 며칠을 머무는 여행자입니다. 이들을 성급히 판단할 수 없겠죠. 성장과 분배의 문제에 손쉽게 답을 내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케랄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여러 주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고, 그 실험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케랄라 모델'이라는 거대한 실험 아래에서, 우리 시대는 어떤 결과를 만나게 될까요. 또 그것이 새로운 모델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다만 케랄라에서 만난 또 다른 인도에는, 지금의 인도와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 #케랄라,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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