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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소년회 쇄신
 
울산소년회 창립.  울산 소년회는 기존 조직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소년운동을 쇄신하기 위해 새롭게 창립하였다. 조선일보(1926.03.17.)
▲ 울산소년회 창립.  울산 소년회는 기존 조직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소년운동을 쇄신하기 위해 새롭게 창립하였다. 조선일보(19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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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7월 16일 울상성우회가 주최하고 방정환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울산소년소녀현상동요동화대회'를 울산소년화는 병영소년회, 언양소년회와 함께 공동 후원하여 1천여 명의 청중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울산어린이 예술 잔치였다. 울산소년회는 1925년 8월 1일 대구소년회에 순회음악무도단 일행이 왔을 때, 학성 소년회 불교소년회 천도교소년회와 같이 후원을 한 단체 명단에 올랐다. 이를 보면 울산소년회는 그 이전에 창립되었다.

울산읍 지역에는 소년단체가 5, 6개가 있으나 대개 각 종교에 속한 단체로 특별히 사회적으로 그 주의(主義)와 입장이 완전함이 적어 소년운동의 필요를 충심으로 절감한 일반 소년들은 이를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25년부터 울산지역에 서진문, 김천해를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활동을 시작하였다. 김천해는 일제시대 일본지역 조선인 노동운동의 대부라고 불리웠다.

1926년 3월 울산소년회가 새롭게 조직되었다. 오흥쇠, 김주석, 박영명, 최윤식, 손명수, 안석주 외 20여 명의 소년이 단합하여 소년회 발기를 맹약하고 양명집(壤明執)의 후원을 받아 제반 준비를 하였다. 3월 13일 토요일 오후 2시 울산청년회관에서 발기총회를 마치고, 다음날 14일 오전 10시부터 창립총회를 하였다. 총회에 천도교평양소년회, 서울청년회, 조선노농총동맹에서 보낸 축사 낭독이 있었다. 당시 서울(경성)청년회에서 언양의 신학업이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축사를 보낸 것 같다.

울산소년회는 민족주의 노선보다 사회주의 노선에 가까운 소년회였다. 즉 경성의 오월회 영향을 받아 새롭게 소년단을 혁신한 것 같다. 강령은 "1. 우리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되기를 期(기)함 2. 우리는 지덕(智德)을 함양하며 건전한 체육의 발달을 도(圖)함 3. 우리는 솔선하여 소년운동의 쇄신에 노력함"으로 정하였다. 임원은 간사 최윤식 박영명 ○선현 오흥쇠 김경술 외 2명으로 하고 간사장에 최윤식을 선출했다. 총회를 마치고 울산소년회는 시위행렬과 제등행렬 행사도 하였다. 임원중 박영명은 1925년 7월 울산성우회 주최로 열린 현상소년소녀동요동화대회에서 동화부분에서 '용감한 소녀'로 2등을 수상했었다.

울산소년회의 창립은 천도교소년회와 다른 "소년운동의 쇄신"을 도모함으로써 사회주의적 무산노동아동을 위한 운동노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조직을 쇄신하기 위해 5월 20일 오후 8시 조선일보 울산지국에서 간사 8명이 모여 간사회를 열었다. 임시의장 안석주의 사회로 "임원 개선의 건, 공로회원 표창 건, <개벽> 분사 설치와 <어린이> 독자 증모(增募) 건, 사회봉공 건, 기관지 발행 건" 등을 토의하고, 이를 임시총회에 제출하기로 하고 10시 30분에 회의를 마쳤다.   1926년 4월 20일, 울산소년회는 따로 '독자회(讀者會)'를 만들어 창립하였다. 독자회는 매주 일요일에 '축구시합', 매주 토요일에 '동화대회'를 열기로 하여 그 당시 의욕적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23일 울산소년회는 옥교동사에서 회원 30여 명이 출석한 가운데 임시 총회를 열었다. 임시의장 안석주의 사회로 간사회에서 제안한 사항을 토의 결정하고 기관지 발행을 결의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임원은 간사장 안석주(安石柱) 간사 지실반(幹事智實班) 김치만(金致萬) 손명수(孫明秀) 노신문(盧愼文), 덕육반(德育班) 박영명(朴永明) 오흥쇠(吳興釗), 체육반(體育班) 이성미(李成미) 박흥식(朴興植) 김경술(金庚述), 서기 최윤식(崔允植)을 선출하였다. 창립총회를 한 지 2개월 만에 조직을 쇄신하여 간사장과 지실반·덕육반·체육반 3개 반을 조직함으로 구체적 활동의 방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간사회에서 <개벽> 분사 설치와 <어린이> 독자 증모(增募)를 논한 것을 보면, 울산소년회의 구성원이 천도교소년회 소속 인원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간사장 안석주는 1925년 3월 울산현상웅변대회에서 청년부 1등을 한 인물이다. 울산소년회 임원들이 그 후 울산 청년운동이나 사회운동에 그 이름이 거론되지 않음은 소년 회원들의 사회적 활동이 적극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동구 일산진 붉은 호랑이, 적호소년단
 
적호소년단 정기총회 - 동면소년단에서 적호소년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적호소년단은 토론회, 강연회, 웅변대회, 운동경기, 야학 운영 등을 하였고 동면 지역을 순회하며 연극을 상연하고 강연회를 하는 계몽 활동을 하였다. 출처 :시대일보(1926.05.13.)
▲ 적호소년단 정기총회 - 동면소년단에서 적호소년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적호소년단은 토론회, 강연회, 웅변대회, 운동경기, 야학 운영 등을 하였고 동면 지역을 순회하며 연극을 상연하고 강연회를 하는 계몽 활동을 하였다. 출처 :시대일보(19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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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지역에서 동구 일산진은 항일운동이 활발했다. 1900년대부터 진출한 일본인으로 인해 방어진 주변 지역은 일본인 중심의 마을이 되었다. 그 옆 일산진은 조선인 중심의 마을이었다. 자연 항일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는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울산 동구는 1900년 초부터 일본인들이 방어진에 진출하여 어업권을 장악해가는 데 반해 조선인들은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배경으로 교육을 받고 싶어도 월사금이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3.1운동을 거치며 교육열기가 고조돼 확산하자 1920년 성세빈 선생이 일산 바닷가 근처에 야학을 열어 이들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지역 유지들의 뜻을 모아 1922년에 사립학교로 설립했다. 사립 보성학원은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이었던 성세빈을 중심으로 운영했다.

1929년 4월 21일 신간회 울산지회 설립 1주년 기념식 때 기념사업으로 울산군내의 민간교육공로자인 성세빈에게 표창을 하였다. 표창 사유는 "10년 전(1919) 조선의 현상을 개탄하며 만주 및 각지로 돌아다니다가(巡遊) 귀향한 후 동면(東面) 청년회를 창립하는 일방으로 무산자를 집합하야 3년간 야학에 교편을 잡고 있다가 사립 보성학원을 건축하여 이래 9년간 전력을 다한 결과 금일에는 2백여 명의 생도를 수용 교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립 보성학교 전경과 교장 성세빈 - 1929년 3월 1일 삼일 독립 만세 10주년을 맞이하여 전교생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출처 : 보성학교 전시관
▲ 사립 보성학교 전경과 교장 성세빈 - 1929년 3월 1일 삼일 독립 만세 10주년을 맞이하여 전교생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출처 : 보성학교 전시관
ⓒ 이보성학교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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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세빈은 동면청년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노동야학을 개설해 일산리와 방어진 등의 농민,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활동을 했다. 일제강점기 언론 보도를 보면 성세빈을 "사회의 사표(師表)"로 칭하고 있다. 성세빈을 당시 사회에서 학식·덕행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세빈의 가계를 살펴보면 집안 전체가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조국의 해방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가열 찬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세빈을 비롯하여 동생인 성세륭도 청년운동과 신간회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었다. 그리고 성세빈은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김천해의 사촌 매형이기도 하였으며,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서진문과 고종사촌이었다.

성세빈 선생은 46세에 사망했는데 주민과 졸업생들이 1940년에 그의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으며 현재 보성학원 전시관 야외마당으로 옮겨졌다. 송덕비에는 '이십여 년의 세월 학교를 지켜오셨네. 바람 불고 비 오는 날도 잠시도 앉아 쉬지 않으셨고 갯벌을 고르고 닦은 뜻 변치 않음도 본래 하늘의 뜻이라 여겼음이지 그 덕행을 잊지 않고 천만년을 이어가리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사립 보성학원에 근무했던 교사들은 성세빈을 비롯해 박학규, 성세륭, 김천해, 서진문, 장성준, 천호문, 이효정 등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었다. 그들은 학생을 가르치며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보성학원은 당시 동구지역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동면청년회→ 동면구락부 → 5월청년동맹 → 울산청년동맹 동면지부로 이어지는 항일청년운동과 동면소년회 → 적호소년회 → 울산소년동맹 동면지부로 이어지는 항일소년운동, 그리고 민족협동전선운동인 신간회의 울산지회 동면지부의 사무실이 바로 보성학원이었다. 이 때문에 보성학원은 일제로부터 교원들의 사상이 불순하다고 1929년 폐쇄 명령까지 받는 등 여러 차례 탄압을 견뎌내야 했다. 1945년 해방 직전 강제 폐교될 때까지 총 21회, 49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울산 유일의 민족사립학교이다. 울산 민족교육을 상징하는 학교이다. 항일 및 독립정신을 심어주고 문맹 퇴치 활동을 하였다. 이곳에 동면소년단이 있었다.

1926년 5월 9일 더욱 소년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보성학원에 모여 새로운 강령을 만들고, 동면소년단을 적호소년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회원들 대다수가 보성학원 재학생과 졸업생이었다. 신임회장 김경출도 그러했다. 회원들의 거주지는 일산리와 화정리, 그리고 방어진이었다. 적호소년단의 강령은 "첫째 우리는 건강한 심신과 혁고한 단결로써 인격을 완성한다. 둘째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상부상조의 정신을 양성한다. 셋째 우리는 대중을 본위로 한 신사회의 건설을 훈련한다"였다.
 
적호소년단 출신 박두복과 김경출 -사회주의 운동가 박두복(1914~?)의 초상화는 적색소년단 회장 출신 김경출(19100~?)이 그린 것이다. 1933년 부산공보 훈도 김경출은 풍속화가로도 활동했다. 출처 :부산일보(1933.05.17.)
▲ 적호소년단 출신 박두복과 김경출 -사회주의 운동가 박두복(1914~?)의 초상화는 적색소년단 회장 출신 김경출(19100~?)이 그린 것이다. 1933년 부산공보 훈도 김경출은 풍속화가로도 활동했다. 출처 :부산일보(193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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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은 당시 시대사조인 사회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임원은 회장 김경출, 서무부 박학조, 교양부 천덕고‧장두석, 운동부 장석준‧박두복, 척후부 김동출‧천연출‧장재수‧서○규‧박두만‧정재하였다. 적호소년단은 토론회, 강연회, 웅변대회, 운동경기, 야학 운영 등을 하였고 동면 지역을 순회하며 연극을 상연하고 강연회를 하는 계몽 활동을 하였다.

1926년 6월 27일 오전 9시에 월례회를 개최하였다. 주일(週日) 강좌, 순회연극, 회원 모집에 대해 결의를 하였다. 1926년 8월 19일 동면 적호소년단은 농촌 소년의 지식개발과 지방발전을 목적으로 일산정(日山亭)에서 소인극과 강연회를 하였다. 연극 제목은 <노동자의 죽엄>, 강연은 성세빈의 "인생의 분깃점에 있는 소년을 유의하라", 장인두의 "자립성을 촉진하다", 그리고 성세륭의 "역사의 진화법과 우리의 운동"이 있었다. 이 소인극과 강연회 제목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함이 확인된다. 강연 연사는 5월 청년동맹원이었다.

적호소년단은 농촌 소년운동의 선구로 많은 노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욱 진용을 새롭게 할 예정으로 1927년 3월 13일 보성학원에서 월례회를 열었다. 회의에서 회원 증모, 기관지 발행, 야학 계속 운영, 소년웅변대회 개최(3월 27일), 정기총회 개회(4월 10일), 야학 담임 교원(박학조, 김강출, 천덕고) 등을 결의하였다.

1929년 울산 동면 적호소년단에서 여름철 휴가기간을 이용하여 문명 퇴치하기 위하여 8월 5일부터 11일까지 일산리, 전하리, 미포리, 주전리, 서부리, 염포리, 방언진 일대를 순회 연극회를 개최하였다. 8월 20일 울산불교소년회에서는 여름 폭염에 시달리는 시민을 위안하기 위해 대구의 일류 악사를 초빙하여 울산청년회관에서 음악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구정월 3일 울산청년회관과 병영청년회관에서 조선일보울산지국 주최로 일반시민 위안 신년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적호소년단은 선배 조직인 오월청년동맹과 연계해 항일의식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적호소년단원들은 <국어독본>을 받으면 <일어독본>이라 고치고, 일본인들이 일산진 약수터에 휴게소를 짓자 야밤에 몰래 가서 휴게소를 부수었기도 했을 정도로 항일의식이 높았다. 1931년 9월 "대한독립 만세", "제국주의 타도" 등의 문구가 적힌 문서가 방어진 주재소에 배달되어 일제 경찰들이 수상에 나섰다. 같은 해 11월에도 방어진 일대 세 곳에서 시국을 비판하는 격문이 부착되었다. 범인은 잡지 못했다. 1934년 4월 보성학원 교사 장기준, 천도순, 정지준이 학생들에게 "메이데이 노동자 무산자 단결"이라는 습자 연습을 시키고, "우리들 노동자, 무산자는 항상 유산계급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으니 노동자 무산자는 힘을 합해야 한다."라고 수업을 하여 검거되었다. 학생 70명의 집까지 압수 수색할 정도로 일제 경찰은 학생들을 억압적으로 탄압하였다.
 
경남적색교육노동협의회 사건 -적호소년단 출신 김경철, 김두복이 연루된 1934년 경남적색교육노동협의회 사건은 당시 조선, 동아일보에서 호외를 뿌릴 정도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비밀결사 사건이었다. 출처 : 동아일보(1933.12.11.)
▲ 경남적색교육노동협의회 사건 -적호소년단 출신 김경철, 김두복이 연루된 1934년 경남적색교육노동협의회 사건은 당시 조선, 동아일보에서 호외를 뿌릴 정도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비밀결사 사건이었다. 출처 : 동아일보(193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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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호소년단 회장 출신 김경출(金庚出 1910~?)은 진주사범전문학교(晉州師範學校)를 나와 부산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근무한 1933년 5월 제6회 6회 부산 미술전에 강력한 필법을 펼치는 신진 풍경화가로 소개되었다. 김경출(25세)은 1934년 조선공산운동사상 드물게 학교에서 아동에게 교과서 내용과 반대되는 의미를 좌익사상을 교육하고, 또 공장노동자에게 계급투쟁을 선동, 교육한 혐의 등으로 1933년 경남적색교육노동조합 비밀결사 사건으로 적호소년단 출신 김두복(22세)과 함께 다른 관련자 21명과 함께 검거되었다. 김경출과 박두복은 부산지역의 공장노동자 조직과 사회주의 학습 지도, 계급투쟁 선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학생들과 사상 공부를 하는 것과 더불어 부산지역 조선방직회사(朝紡)와 환대(丸大)고무공장 등 노동자들이 활동 대상이었고 선전물을 만들어 부산과 창원에 배포했다.

1934년 6월 28일 김경출은 징역 3년, 김두복은 징역 2년을 구형받았다. 둘은 고향에서 친형제처럼 어울렸고 항일운동에선 매우 신뢰하는 동지였다. 이 사건으로 1934년 7월 5일 박두복은 징역 2년, 김경출은 징역 2년 6개월을 최종 선고받았다. 둘 다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경출과 김두복의 경우를 보아도 당시 일산진 적호소년단의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산진은 '제2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사회의식이 높은 지역이었다. 1935년 3월 15일 새벽 등사판으로 찍은 다수의 격문을 집집마다 배포하고, 또 전신주에 잘 보이는 주요 장소마다 격문을 붙인 사건이 발생했다. 5월 1일 방어진 각 전신주에 메이데이 표어가 부착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일산진과 방어진 지역의 의심 인물의 가택을 수색하고 20여 명의 청년을 검거하였다. 6일부터는 보성학원 학생들의 가택을 수색하였다. 11일 일산진을 중심으로 10여 명의 청년이 검거되었다. 아마 적호소년단 출신의 행동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이 뚜렷한 성세빈, 박학규, 박두복, 장인두 등 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었다. 이 격문 사건은 1935년 일제 경찰의 기획 수사로 볼 수 있는 "울산적색노조"사건으로 연결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하였다. 울산읍의 김영호, 방어진의 박학규, 언양의 이동계, 서생의 이미동이 체포되었다. 울산지역 대표적 사회운동가들이었다.

1935년 5월 11일 조선일보는 방어진 메이데이격문 사건을 보도하면서, 방어진 일산진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사건에 연루된 김천해와 서진문, 경남적색교원 사건의 김경출과 박두복 등으로 많은 관계자를 낸 경남사상운동의 중요한 지대라고 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

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언양소년운동사#울산소년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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