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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천문화재단 길동무'에서 작가를 꿈꾸는 청년들을 위한 문학학교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움에 앞서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대학들이 교육부가 평가하는 취업률 산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문학 관련 학과들을 줄줄이 폐지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문학의 가치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왜 하필 지금 문학학교를 연다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그렇다.

이전의 문학은 가라타니 고진의 말대로 언어를 통해 공동체를 통합하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문화적 양식이었다. 또한 문학은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사유의 기본틀로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외부로 표상하는 가장 주요한 형식이었다. 나아가 문학은 무도한 정치권력이 불의를 저지르는 경우 최전선에서 싸우는 투사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문학이 가지는 이러한 역능(力能)으로 인해 당대의 작가는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며 염결성을 가진 총체적 지식인으로서 사람들의 경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효율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자본주의적 세계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체제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는 문학의 가치도 사라져갔다. 지식 체계의 전문화와 함께 매체환경의 변화를 통해 문학의 영역을 대체하는 다양한 콘텐츠들의 범람은 문학을 이른바 콘텐츠 산업의 가장 하위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사람들이 문학을 더 이상 특별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작가는 시장에서 실패한 재화들을 공급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불안정한 일상을 살아가는 작가는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밥은 먹고 다니냐'는 동정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을 지속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해와 같은 일이다. 작가, 그것도 진보적 청년작가를 양성한다는 길동무 문학학교의 설립에 의문을 품은 것도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본이 주는 향락에 적응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경의를 받지 못하더라도 문학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문학은 당위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이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는 세상이 아프다'라는 유마힐의 법언처럼 지금 누군가가 겪고 있는 고통에 감응하는 그들 또한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몰락을 예감하면서도 숙명처럼 타인의 고통을 읽고 쓴다.

사르트르는 작가의 기능을 두고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이에 기댈 때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는 누군가의 고통을 다시 현실로 복원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문학의 언어는 우리의 사유를 지배하는 효율성과 합목적성의 언어가 아니다. 문학은 지배적인 언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언어 사이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충한다. 정치가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문학의 영역이다. 법치와 공정을 앞세운 정치와 자본의 언어에서 사람의 말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어쩌면 문학이 가장 필요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길동무 문학학교가 꿈꾸는 문학도 아마 이런 종류의 것일 거라 믿는다. '함께 묻고 상상하며 새로움을 찾아가는 문학의 산실'이라는 운영 취지처럼 문학과 함께 세계와 소통하기를 바라는 많은 청년 작가들이 더 이상 외로움 속에서 홀로 글을 쓰지 않도록 길동무 문학학교에서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는다.

- 김대현(문학평론가)
 
 

#길동무 문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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