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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24조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해 선거권을 가진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7조 장애인의 참정권 행사를 보조하기 위해 국가는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성문화된 권리가 곧 실질적 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장애인 유권자들은 그들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 받고 있는가?

'장벽 있는' 제20대 대선

지난 3월 9일 제20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등 7개 단체로 구성된 '장애인참정권 보장을 위한 대응팀'에 따르면 이번 대선 투표에서 장애인 참정권 침해 사례가 63건 접수됐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발달장애인 A씨는 가족의 보조를 받아 투표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았다. 그러자 현장 직원은 '발달장애인에 대한 투표보조 지침은 확인된 바 없다'며 막아섰다. A씨와 가족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중선관위')에 확인해줄 것을 요청하며 항의했으나 결국 투표보조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지체장애인 B씨는 "휠체어를 타고서 기표소까지 안전하게 가는 것도 큰 도전"이라며 불편을 호소했다. 실제로 서울시 2264개 기표소를 전수 조사한 결과 장애인 편의시설의 설치 비율은 저조한 수준이었다. 승강기, 경사로, 점자유도블럭, 장애인화장실, 도움벨의 5개 편의시설이 모두 설치된 곳은 64개소에 불과했으며 아무것도 설치되지 않은 곳은 93개소에 달했다. 

기표소가 2층 이상에 위치하지만 승강기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서울시 송파구 장지동 사전투표소에서는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이 2층에 위치한 기표소에 승강기가 없어 접근하지 못하자 1층에 임시투표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제20대 대선 서울시 투표소 장애인 편의 시설 설치 현황 표 (자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그래픽= 조현지 기자)
제20대 대선 서울시 투표소 장애인 편의 시설 설치 현황 표(자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그래픽= 조현지 기자) ⓒ 조현지
제20대 대선 서울시 투표소 장애인 편의 시설 설치 현황 그래프 (자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그래픽= 조현지 기자)
제20대 대선 서울시 투표소 장애인 편의 시설 설치 현황 그래프(자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그래픽= 조현지 기자) ⓒ 조현지
 
장애인 유권자들이 받는 차별은 투표 현장에서 뿐만이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점자, USB, QR코드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선거공보'를 제출한 후보는 총 14명 중 3명에 그쳤다. 장애의 특성에 맞는 선거공보물 제공이 공직선거법에 의무사항으로 규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20대 대선 후보별 ‘시각장애인을 위한 선거공보물’ 제출 현황 데이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그래픽= 조현지 기자)
제20대 대선 후보별 ‘시각장애인을 위한 선거공보물’ 제출 현황데이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그래픽= 조현지 기자) ⓒ 조현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선거공보'가 제공됐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시각장애인 C씨는 "시각장애인용 선거공보에 사진이나 그림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고 묵자(비장애인이 사용하는 글씨)와 점자의 내용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 정확한 정보를 판단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같은 시각장애인이라 하더라도 점자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USB 선거공보에 점자 파일만 담는 등 시각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제20대 대선 ‘시각장애인을 위한 선거공보’ 모니터링 (데이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그래픽= 조현지 기자)
제20대 대선 ‘시각장애인을 위한 선거공보’ 모니터링(데이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그래픽= 조현지 기자) ⓒ 조현지
 
장애인 참정권,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장추련 이승헌 활동가는 "장애인의 참정권이 법률로써 형식적으로 보장되고는 있으나 차별적인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보장"이라고 전했다. "지금의 공직선거법으로는 장애인 참정권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언급하며 특히 발달장애인을 위한 선거권 보장 방안으로 '그림 투표용지'와 '쉬운 선거공보' 도입을 강조했다.

실제 해외 여러 나라들에서는 발달장애인은 물론 문해력이 낮은 유권자가 선거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국은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약집(easy read manifesto)'을 일반 공약집과 구분해 발간하고 있으며 스코틀랜드, 대만, 아일랜드 등 50여 개 국가에서는 그림 투표용지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중선관위는 투표용지의 이미지가 투표에 미치는 영향이 생길 수 있으며 기존 규정 및 개표 시스템 등을 모두 변경해야 하므로 예산상 어렵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영국 노동당의 '이해하기 쉬운 요약'(Easy read summary)
영국 노동당의 '이해하기 쉬운 요약'(Easy read summary) ⓒ 영국 노동당
   
스코틀랜드의 그림 투표용지
스코틀랜드의 그림 투표용지 ⓒ 영국 정부
 
중선관위의 충분한 선거사무원 교육도 방안으로 제시되었다. 장추련 이승헌 활동가는 "투표소 내 직원이 장애인 투표보조용구를 사용할 줄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이에 따른 참정권 침해 사례가 많이 발생한다"고 전했다. 

또한 "발달 장애인이 무리 없이 움직이고 말한다고 해도 투표 행위에 필요한 소근육을 세심하게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시정권고와 법원 임시조치 강제조정에도 불구하고 중선관위는 여전히 신체 또는 시각의 장애만 투표보조를 허용한다는 지침을 내리고 있어 문제"라고도 언급했다. 장애인 유권자들이 투표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장애 유형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벽 없는' 지방선거, 기대할 수 있을까?

중선관위는 지난 4일 장애계 활동가들과 함께 실무자 회의를 진행했다. 장애계 측에 따르면, 중선관위는 발달장애인에게도 선거보조를 허용하는 임시조치가 이번 대선 직전 결정되면서 충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 혼란으로 인해 장애인 참정권 침해 사례가 다수 발생했음을 인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각 지역 선거사무소에 추가 공문을 통해 장애인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하는 데 차별 받지 않도록 조치하는 등 재발방지대책을 구체화할 예정이라고도 밝혔다. 

한편 발달장애인 당사자 조직 한국피플퍼스트는 오는 24일 11시 중선관위 과천 청사 앞에서 '발달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지난 16일 중선관위가 발표한 추가 안내공문의 "'인지상의 어려움'의 경우 투표보조를 받을 수 없다"는 내용에 항의하는 취지이다.

연세대학교 객원교수를 겸임하고 있는 김정환 변호사(법무법인 도담)는 "'기본권'은 국가로부터 권리의 침해를 방지하려는 방어적 의미도 갖지만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형성적 의미 역시 가진다"며 "기본권의 속성으로부터 국가의 의무가 당연히 도출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참정권을 행사하기 위한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선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정권을 단순히 투표소의 기표대에서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것만으로 정의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아주 간편하게 '장애인에게 참정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권리가 주어진 권리(given right)가 아닌 얻어낸 권리(acquired right)라는 점을 이해하는 사회라면 그 대답은 달라진다. 

오는 6월 1일 치러질 지방선거에서는 장애인 유권자가 국가를 향해 그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장애인참정권#선거#배리어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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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조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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