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전통의 고택(古宅)에 외국인들이 하룻밤 묵어가겠다며 찾아왔다. 지리산 자락 상사마을 쌍산재를 배경으로 한 TV프로그램 <윤스테이>를 보며 문득 잊고 있었던 소중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몇 년 전 늦가을, 1박2일 여정으로 안동 여행에 나선 적이 있었다. 하룻밤 묵을 곳을 찾던 중 우연히 옥연정사를 알게 되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하회마을 건너편 부용대 기슭에 자리한 옥연정사는 선조때 서애 류성룡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지내며 국보인 '징비록'을 집필한 곳이다. 지금은 서애 선생의 15대손이 거주하며 숙박을 원하는 손님들을 묵어갈 수 있게 한다고 했다.
봉정사를 거처 마지막 타오르는 도산서원의 아름다운 단풍에 가슴을 붉게 물들이고 월영교를 구경했다. 헛제사밥 한 그릇으로 요기한 뒤 옥연정사에 도착했다. 안주인이 나와 반갑게 맞으며 묵을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넓은 대청마루를 지나 방에 들어서니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안았다.
쌀쌀한 11월 여정인데다 오후에는 잠시 겨울을 재촉하는 비까지 지나간 터라 잔뜩 움츠려 있던 몸이 스르르 풀리며 편안해졌다. 침구가 깔려 있는 방 안에는 옛 여인들이 사용하던 작은 거울과 휴지통이 전부였다. 나는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이불속으로 다리를 뻗고 한참 동안 그저 앉아있었다.
안주인이 따뜻한 조릿대차와 찐 고구마를 내왔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곁에 있는 안채로 식사를 하러 오라고 일러주며 오늘 손님은 나 혼자라는 말도 했다. 바깥에 있는 욕실에 다녀와 대강 정리하고 앉으니 아늑하고 편안하다. 영원의 시간속으로 들어온 듯 사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잊고 있었던 또다른 나와 마주하며 오래 깨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마당 한쪽에 있는 간죽문을 나서니 떠오르는 태양에 햇살이 길게 비친 강과 마치 편안하게 잠든 아기처럼 납작납작 엎드린 하회마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처음 보는 아름다운 풍경에 온전히 마음을 뺏긴 채 한참을 서있었다.
안주인이 식사준비가 다 되었다며 나를 찾았다. 나는 고택의 식구들과 정갈하고 깔끔한 밥상을 마주했다. 안동의 특미라는 북어보푸리가 입맛을 돋우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고 주인장이 고택의 내력과 숙박객을 맞게 된 과정 등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그때 들은 얘기 하나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얼마전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을 왔었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지난해에 한 번 들른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젊은 부부가 주인장에게 털어놓은 얘기인 즉,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준비를 하던 중 예기치 않은 갈등에 맞닥뜨렸고 급기야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져버려 결국 결혼 얘기를 없던 일로 하기로 한 뒤 옥연정사에 이별여행을 왔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무서우리만큼 적막한 고택에서 하루 묵으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얘기를 나누었고 그러면서 서로 쌓인 앙금을 풀 수 있었다고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살아가면서 그 일을 잊지않기 위해 고택으로 다시 신혼여행을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날 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얘기였다.
'윤스테이'를 찾은 외국인들은 자신이 본 한국영화의 배우들이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고 대접을 받으며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하는 새로운 경험에 신기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은 지 수 백년된 집에 머물며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푸근함을 느낀다. 사람냄새 폴폴 나는 고택에서 정겨움과 따뜻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