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0일 정년퇴직했다. 퇴직하면 무지갯빛 세상 만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회사 조직을 떠나서 홀로의 시간을 어떻게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가늠해보았다. 퇴직은 또다른 시작을 의미하기도하므로 그 새로운 삶을 서울서 부산까지 자전거국토종주로 시작하기로 계획했다. 하루에 약 60여km쯤을 달리는 여정을 함께 나눈다.[기자말] |
정년, 이날이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노동이 세상의 이치를 배우는 방법이고,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존재의 방식이며, 보람을 통해 내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고 여겼다. 내 삶을 가치롭게 만드는 소중한 방법, 이 생각으로 집에서 직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다행인 것은 육신이 대부분의 근로를 견딜 만큼 건강했다.
35년 전쯤 오랫동안 정분을 이어오던 지금의 남편이 결혼을 망설일 때, 그 이유를 물었다. "가정을 꾸릴 만한 돈을 벌 자신이 없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답했었다. "그 이유라면 문제없다. 돈을 버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노동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 때문이었다.
정년은 내 존재의 가치라고 여긴 것을 '이제 그만 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시 곱씹어본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정년'. 지금도 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나의 정년은 이 직장에서 노동을 양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계속될 것이고 나는 다른 형태의 노동을 이어갈 것이다.
정년 전과 후의 차이는 단 한 가지
우주의 시간은 나의 정년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 연속된 시간을 단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내 자신이다. 나에게 있어 정년 전과 후의 차이는 단 한 가지일 뿐이다. 하루의 내 시간 중 회사에서 8시간의 지분을 가졌다. 이제부터 그 지분을 돌려받아 24시간 내가 운용한다는 것이다.
내 정년 후의 노동은 이런 형태가 될 것이다.
1. 서울-부산 국토종단 자전거 여행
2. 섬 살기
3. 산 살기
4. 사찰 기행 및 스님과의 차담
5. 수행 및 명상
6. 아들과 영국 및 유럽 살기
7. 민화 열공과 민화 해외소개
8. 남편과 세계탐험
9. 프리랜서 근로 및 봉사
이 계획들은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중에는 몇 년 전부터 해오던 개인적인 일도 있었으므로 사실 새로운 것은 반도 되지 않는다. 이렇듯 별다른 게 아닌 것을 열거하고 꼽아본 것은 나의 24시간에 대한 관리 책임 때문이다.
돌려받은 시간이 8시간이라지만 전후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업무를 준비하는 시간과 출·퇴근 시간을 합하면 12시간이 훌쩍 넘는다. 간간이 있었던 업무시간 외 근무까지 합하면 그 이상의 시간이다. 내 하루의 반을 돌려받은 셈이다.
갑자기 많아진 시간들 앞에 나태해지지는 않을까를 염려했다. 사람의 속성이 풍족해지면 헤프게 쓴다는데 혹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붙들어 매기 위함이다. 확실한 것은 이 일들의 정년은 내 죽음이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감사함뿐이다. 직장이라는 조직 속에서 나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이, 힘든 순간과 다급한 순간들을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 결과 부모와 남편의 어깨를 조금 가볍게 할 수 있었고, 아이들이 자신의 날개를 갖게 되기까지 육추를 할 수 있었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정년퇴임식이 끝나고 잠시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정년이 늙음에 더 가깝고 죽음에 한 발 더 다가섰다는 속성도 아울러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내게 근로는 보람이었지만, 분명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배우고 싶은 것을 미루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의 형편에 내가 시간을 맞출 수 없었던 것이 그러하다. 이제 내 시간의 주인은 나고, 내 팔은 온전히 내가 흔들 것이다.
자연의 속도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될 수 있음에 설렌다. 여명에 일어나 기도하고 내 마음속을 깊이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다이아몬드같이 반짝이는 시간 속으로 나의 하루하루를 던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게 포스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