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만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영남 지역 최초 3.1운동이었다. 흔히 '대구 큰시장'이라 불렸던 옛 서문시장 입구(구 동산파출소 터)를 출발한 시위대는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대구읍성 영남제일문 터(약전골목 내 종로와 남성로 교차 지점), 남장대 터(현 중앙파출소)를 거쳐 달성군청(대구백화점)에 이르렀다. 이때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80연대가 출동해 무자비한 구타로 시위대를 무력 진압했다.

일본군은 대구 3.1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조금 전 서문시장 입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김태련(金兌鍊)을 집중적으로 구타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아들 김용해(金湧海)가 아버지를 구출하려고 몸부림을 쳤다. 일본군은 김용해를 무참하게 폭행한 후 실신한 그를 하수구에 내던졌다. 일제는 의식을 잃은 김용해를 끌고 가 악독한 고문까지 자행, 그가 죽음 직전에 이르자 3월 28일 가석방했다. 그러나 김용해는 바로 다음 날인 3월 29일 숨지고 말았다.
 
 1919년 대구 독립만세운동을 기관총 등으로 무력 진압했던 일본군 80연대의 주둔지에는 현재 미군 부대 캠프헨리가 들어서 있다.
1919년 대구 독립만세운동을 기관총 등으로 무력 진압했던 일본군 80연대의 주둔지에는 현재 미군 부대 캠프헨리가 들어서 있다. ⓒ 정만진
 
당시 일본군 80연대는 1916년부터 현재의 캠프헨리(Camp Henry, 남구 이천로 100) 자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6만2천 평 규모의 캠프헨리는 주한 미군 병참‧행정 사령부로, 일본군 80연대가 주둔했던 군사 용지와 시설을 1945년 10월 1일 이어받았다.

청일전쟁 때부터 대구에 주둔했던 일본 군대

일본군이 (임진왜란 시기를 제외하고) 대구에 처음으로 군사 진지를 구축한 것은 청일전쟁(淸日戰爭) 때인 1894년이다. 이때 병참 부대가 대구 달성(達城)에 주둔했고, 헌병대가 토성 동쪽 비탈에 설치되었다. 통신 수비대도 토성 인근에 배치됐다. 261년(신라 첨해 이사금 15) 이래 국가 군사 시설이었던 달성토성은 서울 풍납토성과 더불어 대한민국 고대 축성술을 증언해주는 중요 사적인데, 그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일제는 고의로 겨레 정기가 서려 있는 역사유적을 군화로 짓밟았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일제는 1905년 우리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이곳을 공원화했고, 1906년 일본 왕에게 절하는 요배전을 설치했으며, 급기야 1914년에는 서울 남산 다음으로 규모가 큰 신사까지 세웠다.

사적을 공원으로 만들어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든 일본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露日戰爭) 때에도 자국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대구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일제는 1907년 현재의 남구 대명로 240 일대에 경비행장, 사격장, 군사 훈련장을 설치했다. 이곳 22만6천 평은 1950년 이래 미군 부대 캠프워커(Camp Walker)가 되었고, 현재는 헬기장과 위락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이 경비행장 등으로 사용했던 대명동 땅은 해방 이후 캠프워커로 바뀌었다. 캠프워커는 현재 헬기장, 위락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일본이 경비행장 등으로 사용했던 대명동 땅은 해방 이후 캠프워커로 바뀌었다. 캠프워커는 현재 헬기장, 위락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 정만진
 
대구에는 캠프워커와 캠프헨리 외에도 미군 관련 지역이 한 곳 더 있다. 캠프헨리에서 북쪽으로 300미터가량 떨어진 이천로 19길 55 일대의 캠프조지(Camp George)가 바로 그곳이다. 캠프조지가 점유하고 있는 이 땅은 일제가 1938년 이래 운동장, 승마장, 훈련장 등으로 썼던 곳이다. 현재 캠프조지 중 이천동 지역에는 캠프워커와 캠프헨리 근무 군인의 자녀들을 위한 '외국인 학교'가 들어서 있고, 대명동 지역에는 '대명 외국인 아파트'라는 이름의 주거 시설이 건립돼 있다.

일본의 한국 점령 양해한 미국... 노골적인 미일 간 흥정

일본군 80연대가 미군 캠프헨리로, 일본군 경비행장이 캠프워커로, 일본군 승마장이 캠프조지로 바뀌었다. 이렇듯 대한민국 국토에는 일본 군대와 미국 군대가 대를 이어 주둔하고 있다. 일본과 미국이 한국을 놓고 노골적으로 흥정을 벌인 사건이 떠오른다.

1905년 7월 29일 일본 수상 가쓰라(桂太郞)와 미국 육군성 장관 테프트(Taft) 사이에 이른바 '가쓰라‧테프트 밀약'이 맺어졌다. 이 밀약의 핵심은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삼키자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결국 '겨레의 집'인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다. 5천 년 동안 대대로 살아온 집에서 내쫓긴 우리는 한뎃잠을 자는 노예 신세가 되었다. 남의 나라를 짓밟은 후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착취해 자국의 풍요를 누리려는 제국주의자들의 희생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이 승마장 등으로 사용했던 이천동과 대명동 땅은 현재 미군의 캠프조지가 되었다. 캠프조지에는 대구 주둔 미군 가족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가 세워져 있다. 사진은 캠프조지 정문.
일본이 승마장 등으로 사용했던 이천동과 대명동 땅은 현재 미군의 캠프조지가 되었다. 캠프조지에는 대구 주둔 미군 가족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가 세워져 있다. 사진은 캠프조지 정문. ⓒ 정만진

#가쓰라테프트밀약#1905년#제국주의#캠프헨리#캠프워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