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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 상임전국위 '무산'... 굳은 인명진  새누리당 쇄신을 논의할 상임전국위원회가 6일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자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과 정우택 원내대표가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 새누리 상임전국위 '무산'... 굳은 인명진 새누리당 쇄신을 논의할 상임전국위원회가 6일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자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과 정우택 원내대표가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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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내분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지난해 말 의원 30여 명이 나간 뒤 인명진 목사를 비대위원장으로 데려와서 남은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뭔가 내놓나 싶더니 위원장 추대 하루만에 '인적 쇄신'을 하네마네 하는 문제로 또 집안싸움이다.

국회가 4당 체제로 바뀌면서 집권여당이 겪어야 할 '성장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당의 존립마저 위태해보였던 더불어민주당이 가장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대통령 궐위에 대비한 후보 경선을 착착 준비하는 것은 여당으로서는 뼈아프게 생각할 대목이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 여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조차 새누리당 집안싸움에 신물이 날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싸움을 단지 '싸운다'는 이유만으로 혐오하고, 싸움의 과정과 목적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밥그릇 싸움'으로 치부하는 냉소는 정치를 이해하는 가장 저열한 접근법이다. 정치허무주의가 결과적으로 '개싸움'으로 유도하는 쪽을 돕는 비극으로 이어질 때가 많았다는 것도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정우택의 아버지 정운갑을 떠올리다

싸울 수 있다. 시비를 다투면서 차이점을 좁혀가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넘어서는 안될 선'은 엄존한다.

지난해 12월 16일 새누리당 새 원내대표에 정우택 의원이 당선하고, 또 그가 영입한 인명진 비대위원장이 친박 강경파의 반발에 부딪히는 상황을 보며 나는 정 의원의 부친, 정운갑 전 의원을 떠올렸다.

많은 이들에게 잊혔지만, 정운갑 의원은 1979년 신민당 내분 사태 당시 김영삼 총재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박정희 집권 마지막 해에 있었던 1979년 신민당 사태는 그해 5월 30일 전당대회에서 김영삼(378표)이 이철승(367표)을 11표 차이로 누르고 총재에 당선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3년 전 신민당 전당대회(1976년 9월 16일)에서는 이철승(389표)이 김영삼(364표)을 아슬아슬한 차이로 누르고 대표에 당선했다. "자유와 안보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라면서 박정희 정권에 타협적이었던 주류 이철승계에 대해 김영삼·김대중이 힘을 합세해 얻어낸 승리였다.

이철승에 비해 꼬장꼬장했던 김영삼 총재의 등장을 박정희 정권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의 한수'로 나온 것이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었다.

그해 6월 25일 중앙선관위가 "전당대회에서 투표한 조윤형·김한수씨 등은 선거법상 정당원 자격이 없다"라는 유권해석을 내리자 8월 13일 신민당 원외위원장 3인(유기준·윤완중·조일환)이 서울민사지법에 소송을 낸 것이다.

9월 8일 서울민사지법 합의부 조언 부장판사는 가처분 신청이 이유 있다며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김영삼을 대신해 총재 직무대행을 맡을 사람으로 정운갑 전당대회 의장을 선임했다.

신민당은 어떻게 됐을까?

9월 10일 김영삼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법원의 가처분 결정을 '정치권력에 의한 조작극'으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선언했다. 반면, 비주류는 비주류대로 정운갑 의원을 새로운 총재로 추대했고, 정 의원은 9월 17일 권한대행을 수락하겠다고 발표한다.

 1979년 10월 25일 신민당 정운갑 총재 직무대행이 당 내분 수습을 위한 각 계파 중진회의 참가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1979년 10월 25일 신민당 정운갑 총재 직무대행이 당 내분 수습을 위한 각 계파 중진회의 참가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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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9월 26일 김영삼 측은 마포당사에서 대규모 지지대회로 세 대결에 나섰다. 김영삼 측에서는 김수한·김영배·김재광·김현규·노승환·박영록·박용만·손주항·송원영·신상우·예춘호·오세응·이기택·이민우·이용희·정대철·최형우·황낙주 등 지지 의원 42명 명단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철승을 비롯해 고흥문·김원기·신도환·유치송·조세형·채문식·한영수·허경만 등 25명은 서명에 불참해 결과적으로 '정운갑계'로 분류됐다.

10월 4일에는 집권공화당 주도로 국회에서 김영삼 총재 제명안이 단독 처리됐다.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죽지 않았다면 신민당 사태는 결국 분당으로 끝났을 것이고, 그러한 결과는 박 대통령의 '분할지배' 전략에도 부합됐을 것이다.

'김영삼 총재 밀어내기'의 배후에 야당의 계파 다툼을 이용한 청와대의 공작이 있었음은 훗날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충식이 쓴 <남산의 부장들>에는 "가처분사건 당시 김영삼 총재 변호인이었던 이택돈 의원의 변론요지가 어찌된 영문인지 재판 전날이면 꼭 (차지철의) 청와대 경호실을 거쳐 남산(중앙정보부)으로 떨어져 그걸 토대로 대책회의를 했다"는 중정 국장(익명)의 증언이 실려 있다.

박 대통령이 뿌린 씨앗이었지만, 그의 장례식날 최규하 정부가 김영삼과 정운갑 중 누굴 야당 총재로 예우할지를 놓고 갈피를 못잡을 정도로 야당에 입힌 상처는 컸다. 그럼에도 역사는 순리대로 흘러갔다.

내분 사태를 일으켰던 지구당위원장 3명은 12월 12일 "김영삼 총재가 뚜렷한 이유 없이 지구당위원장 직을 박탈하려고 한 것에 자극받아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시대적 흐름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정권적 차원에서 일해나가야 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감안, 가처분 신청을 취하한다"라는 성명서를 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12.12 쿠데타'라는 역사의 반동이 시작된 날이었다.

신민당의 당권은 다시 김영삼에게 넘어왔지만, 이듬해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이라는 더 큰 물살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영삼과 정운갑 모두 전두환 정권 전반기 4년간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이는 고초를 겪었다.

1979년 하반기 '신민당 2중권력' 사건은 한국 야당사에서 감추고 싶은 '흑역사'다. 그러나 잘잘못을 엄히 따지자면, 유신권력의 하수인이었던 법원의 힘을 빌려 얻어낸 '총재 직무대행' 자리를 받아들인 정운갑 의원의 행보를 떳떳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청원에게 박수 보낼 이는 얼마나 될까

정운갑 의원의 아들이 새누리당 정우택 원내대표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아들은 아들이다.

새누리당 사태만 놓고보면, 외부인사를 영입해서 '망해가는 집구석'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는 정우택의 진정성까지 깎아내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인명진 비대위의 출범은 서청원·최경환 등 일부 의원들의 저항에 막혀있다. 이들의 운명을 결정할 비대위는 상임전국위원회가 이미 한 차례 무산돼 기약을 모르게 됐다.

한나라당 시절 대표까지 지냈던 서 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권능을 이용해 상임전국위를 무산시켰다고 해도 이것의 위법성·불법성을 따져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 마시는 서청원 서청원 의원이 2016년 12월 29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전국위원회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 물 마시는 서청원 서청원 의원이 2016년 12월 29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전국위원회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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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되는 부분은, 어떻게든 비대위를 지켜내겠다는 인명진 위원장 기자회견에 대한 서 의원의 다음과 같은 대응이다.

"정당법 54조에 '탈당을 강요하는 자'에 대해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탈당 강요는 범죄이며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무식한 짓이다. 저는 '위계와 강압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를 검토하고 있으며 곧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출하기로 했다."(8일 보도자료)

서 의원은 "정치적 싸움의 최종 종착역은 법의 판단이다. 탈당을 강요하는 사람들 모두 처벌 대상이고 인 비대위원장, 정우택 원내대표 모두 고발대상이다. 9일부터는 법적 대응에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서 의원은 9일 오전 서울남부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정말 정치적 싸움의 최종 종착역은 법의 판단일까? 정치적으로 풀어내야 할 문제, 그것도 당내 문제를 법관 몇몇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 온당한 해법이라고 대다수 국민, 당원들도 생각할까?

재판에서 질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인명진 비대위를 축출하는 '옥새 투쟁'에서 서 의원이 설령 승리한다고 해서 그에게 흔쾌히 박수를 보낼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서 의원은 2009년 5월 14일 18대 총선 '친박연대' 공천헌금 사건으로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2013년 10월 30일 경기 화성갑 보궐선거 당선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당시에도 그를 공천하는 것이 온당하냐는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지역구 주민들이 연거푸 그를 대표로 선택한 결과까지 부정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를 "7선 의원(지금은 8선)이 되면 그야말로 정치에서는 '신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추켜세웠던 황우여 당시 대표도 지금의 사태를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서 의원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정치적 대부'로 여겼던 김영삼의 유지를 따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가처분 결정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는 헌정의 일익을 담당하는 정당의 지도 기능이 민사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1979년 9월 10일 기자회견)

생전의 김영삼 대통령은 법원 결정의 옳고그름을 떠나서 법원이 정당 대표의 자격을 따지는 행위 자체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드러냈다. 이에 대한 서 의원의 답변이 궁금하다.


#서청원#인명진#정우택#정운갑#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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