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예술단 안종미 단장(51.여)은 공연을 많이 다니면서 여러 가지 황당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하루는 공연을 마치고 식사하는 자리였다. 행사를 마치고 모두 한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았는데, 그날 행사를 주최했던 사람들이 안종미씨와 함께 공연했던 단원들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주최측 사람이 저에게 아까 함께 공연했던 사람들이랑 같이 다니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왜요?' 물었더니 '잉, 말이여 레벨이 맞아야지. 그렇게 못생기고 그런 사람들과 다니면 되겠냐고' 그래요. 이거 미치겠는거요, 민망해서. 옆에 단원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못 알아보고 그러니. 이 말을 들은 단원들 중에 몇 사람이 공연하는 일을 바로 그만 두었어요. 쓸데 없는 말이 큰 상처가 되었던 거죠."
출연자끼리 서로 싸우는 일도 있었다. 경로잔치행사였는데, 그 날의 메인 게스트 A씨가 공연마지막 순서였다. A씨 바로 앞 공연이 이 마을 출신의 여자가수였다. 관객들이 가족, 친척 등 다 아는 사람들이라 여자가수에게 앙코르가 막 쏟아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여가수는 흥이 나 뒷순서는 생각하지 못한 채 고향사람들을 위해 긴 메들리송을 불렀다. 비가 내려 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떠나는 그런 상황에서 앞가수가 앵콜을 받아 긴 메들리로 해버리니 메인게스트가 화가 난 모양이었다.
"노래를 끝내고 여가수가 돌아오자 서로 싸움이 붙은 거예요. 이게 뭐냐. 기본도 모르는 니가 연예인이냐. 다음 사람 생각도 안하냐며 난리가 난 거예요. 서로 쌍욕을 하며 싸우니 분장실이 난장판이 된거예요. 근데 공연을 해야 되잖아요. 내가 마지막 공연자 소개를 했어요. 싸우든 어쨌든 관중들이 있으니. 그랬더니 막 욕을 하며 싸우던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대에 올라와 공연을 해요. 그 사람이 관중 없는 빈무대에 올라가고 싶었겠어요. 근데 아무 내색 없이, 관객들이 거의 떠난 빈무대에서 아주 열심히 공연을 해요. 그때 프로란 저래야 되는 거구나 하는 것을 배웠죠."
안종미 단장이 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에서 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이춘희선생께 민요를 배울 때였다.
"저는 어릴 적부터 발발성이라 해서 떠는 목소리가 자동으로 났어요. 바이브레이션, 안좋게 얘기하면 염소 우는 소리, 그게 많이 나오는 목소리예요. 선생님이 어느 날은 20명 학생중에서 딱 저를 지목하더니 입을 벌리지 않고 노래한다고 볼펜을 입에 물고 소리를 하라고 그래요. 그게 저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죠. 학생 20여명이 디귿자 형태로 앉아있는데, 볼펜을 어금니에 끼고 노래하면 이게 칠푼이 처럼 보여요. 말도 새고, 침도 흐르고. 창피하잖아요, 다 큰 성인인데."
오기가 났다. 집에서는 따로 연습할 공간이 없고, 가족들이 노래하는 것을 싫어해 길옆에 차를 주차해 놓은 채 장구를 들고 다니면서 조수석에 앉아 민요를 불렀다.
"남편은 장구 치면 무당집 같다고 장구 치지 말라 그러고, 시부모님은 젊은 며느리가 밭에 나가 일하지 않고 방에서 뚱땅거린다고 싫어하고. 공부할 곳이 차밖에 없는 거예요. 근데, 차처럼 좋은 곳이 없는 거예요. 다른 거 신경 쓸 것도 없고. 장구를 차에 싣고 도로를 가다보면 갓길이 좀 넓은 곳에 차를 세워 두고 조수석을 눕혀 거기서 장구를 쳐요. 음악을 틀어놓고 장구 치고 노래를 따라하고. 차가 획획 지나가면서 누가 노래하는지, 서 있는지 신경 안써요. 거기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차 안에서 연습하는 거예요. 연습할 곳이 없으니까. 율동은 차 안에서 못해요. 그것은 들판에 가면 팔각정이 지어져 있어요. 친구들 데리고 팔각정에서 율동을 연습했어요."
그녀는 각종 경연대회를 많이 다니며 실전경험도 많이 쌓았다. 심사위원들이 자신의 실력을 어떻게 판단할까 그 테스트를 받기 위해서 그녀는 계속 대회에 나갔다. 심적 타격도 많이 받았지만 30여 회의 경연대회 출전을 통해 그녀는 많이 달라지고 발전해 갔다. 2007년도에 인천시장상을, 2011년도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2013년에는 서산시 문화대상을 수상하였다.
"저는 경연대회를 통해 사람이 큰다고 생각해요. 경연대회 한 번 갔다 오면 엄청난 발전을 하고 달라져요. 나의 실력을 정확히 판단 할 수 있고, 남의 노래를 듣고 비교도 할 수 있고. 매일 보는 선생님과 공부해서는 큰 자극이 없어요. 근데 대회를 갔다 오면 상처 받고 자극 받고, 어떤 때는 '내가 이 정도면 괜찮네' 뭐 이런 비전도 보고."
경연대회에서 눈물 흘리는 일도 많았다. 중간에 박자를 놓쳐서 떨어지고, 너무 떨리고 긴장해서 가사를 까먹기도 하고, 감기가 걸려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속상하고 자존심도 무너진다.
"점점 내 차례가 올수록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입안에 침이 완전 1%도 안남게 바짝 말라요. 심사위원이 앞에 7~8명 앉아 있잖아요. 아무것도 안보여요. 들리지도 않고. 내가 노래를 어떻게 했는지, 가사를 붙였는지, 후렴이 제대로 됐는지 전혀 생각이 안나요. 평소에 그렇게 잘 하던 것도 못하고. 박자가 틀리거나 가사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그랬겠어요. 그럼, 그 다음 날부터 더 열심히 공부하죠. 다음 번에 만회하기 위해서. 경연을 통해서 내 자신을 가다듬는 거죠. 채찍질을 하는 거고, 인생공부를 하는 거죠."
안종미 단장은 30세에 서산의 차태완선생 밑에서 민요를 시작하였으니 늦깎이 출발이었다. 차선생의 민요교실이 사정상 문을 닫게 된 후 선소리산타령 이수자 배수옥선생의 출장강의를 받으며 다양하고 깊이 있는 소리를 터득해 나갔고, 서울을 다니면서 무형문화재 19호 선소리산타령 보유자인 황용주선생께 전수와 이수과정을 밟았다.
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에서 이춘희 선생께 가르침을 받고, 국립국악원에서 김영임선생께 회심곡을 배웠다. 요즘은 내포제시조 문화재 예능보유자이신 박선웅선생께 시조를 전수받고 있다. 그 동안 각종 경연대회에서 많은 상장도 받았고, 지금은 세월이 흘러 제자를 양성하는 중견국악인이 되었다.
지방에서 국악을 가르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배우는 학생들도 적은지라 마음먹은 대로 학생과 학부모들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어머 얘는 이뻐요. 얘는 가능성이 있어요.' 등 때로는 달래가며, 잘한다며 등을 두드려가며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국악공부는 스승밑에서 엄격하게 체계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제대로 국악을 공부하는 아이들은 엄청 엄하게 배워요. 선생님한테 눈물 쏙쏙나게 혼나요. 바른 자세로 앉아야 되고, 자세가 흐트러지면 안되고, 잡소리 해도 안되고, 아주 엄격하게 가르쳐요. 징징거리고, 말 안듣고, 웬만큼 자세가 안나온다 싶으면 보내버려요. 엄마들에게 '이런 아이를 왜 데려오느냐'며 아주 혼내요. 그러면 알아서 자세를 잡아가지고 와요. 사람을 만들어 놓는 거죠. 그 얘들이 앞으로 10~20년 공부해 가야 되잖아요. 그런 자세로 배운 아이들이 국악예고 나오고, 대학교 거치고, 석사나 박사과정 지나면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20대 중반에도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정말 옥구슬이에요. 감탄스러운 소리들이 나와요."
안종미 단장은 국악을 할려면 공부를 할 시간이 있어야 되고, 타고난 예술적 재능이 있어야 되고, 장시간 투자할 경제적 여력이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세가지 조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국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떤 학생은 정말 재능이 욕심날 정도예요. 근데 공부는 하지 않고 술 먹고 놀기만 하는 거예요. 타고났으면 뭐해요. 뜻이 없고 좋아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거죠.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해야 되요. 타고나야 된다, 돈이 있어야 된다, 시간이 있어야 된다는 이 3가지보다 우선시 되는 게 스스로 좋아해야 된다는 거죠. 자기 스스로 노래를 하면서 행복하게 느껴야 되요. 제가 장구를 배울 때였어요. 자잖아요. 자다가 잠결에 지금 연습하면 뭔가 될 것 같아요. 자다가 일어나 이불속에서 막 장구를 쳐요. 무슨 가사가 생각날 듯 말 듯 하면서 안나요. 그럼 일어나서 봐야 되요. 보고 이거였구나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것을 한동안 경험해야 되요. 너무 좋아서, 한동안 미쳐서 빠져있을 때, 그 때 실력이 확 늘어나는 거죠."
국악을 하면서 그녀는 항상 혼자였고, 뒷바라지 없이 자신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걸어왔지만 오늘의 자신이 되기까지 좋은 스승의 가르침과 지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안종미 단장은 그 분들께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여러 스승님의 가르침이 있었죠. 저는 꼭 스승님의 이름과 고마움을 언급해요. 방송이나 신문에 제 기사가 나면 스승님의 존함이 거명되었으니 가져가 찾아 봬요. 차태완 선생님께 배워서 나간 제자가 수도 없이 많지만 지방의 알려지지 않은 소리꾼이라 '차선생님이 내 스승이다' 라고 말을 안해요. 알려진 선생님이면 제자들이 하루를 배워도 '나는 OOO 선생님 사사생이다' 그런다 말이에요. 근데 차선생님은 자신에게 5년 10년을 배워도 자신을 스승이라고 언급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근데 안종미만 인터뷰나 방송에서 당신 이름을 스승으로 항상 언급하고 인정해주고, 명절 때 찾아오니 감사하다고 그러세요."
무궁화예술단 안종미 단장은 자신의 마음에 품고 있는 계획과 포부를 이렇게 밝힌다.
"제가 대통령상은 한번 도전해 보고 싶고요, 국악이론도 계속 공부해 나갈 생각입니다. 지금보다 더 내실 있게 실력과 자질을 갖춰가도록 노력할 겁니다. 또 시조나 민요, 선소리산타령을 보급하는데 힘을 써야겠죠. 시조나 민요의 미래가 좀 불투명하잖아요. 하시는 분도 별로 없고, 인기있는 종목도 아니고, 특히 시조같은 경우는 거의 일반인들이 등한시 하는 상황이고. 내포제시조 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이상 열심히 해서 대중속에 뿌리를 탄탄히 내려야 겠죠. 특히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쪽, 미래의 꿈나무들한테 더 에너지를 쏟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국악인 안종미 약력 |
현)무궁화예술단 단장 현)선소리산타령 충남 지회장 현)내포제시조 보존회장 충청남도 서산시 출생 2007년 인천국악대제전 대상 2011년 대한민국 여성전통예술경연대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수상 201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 2012년 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 경기소리 최고지도자과정 졸업 201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이수 2012년 '안종미의 산천초목이 다 무성한데' 출반 2013년 서산시 문화대상 2015년 '안종미 선소리산타령 청산에 저노송은' 출반 미국 UCLA 뉴욕 워싱턴, 캐나다,우즈베키스탄 등 공연 중국 연변대학 안위방송국 합비방송국 등 공연 예술의전당 우면당,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KBS 국악대상시상식 등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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