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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임란의병 한천전 승첩지> 전경. 사진 오른쪽에 외삼문, 가운데에 충훈당, 충훈당 왼쪽 뒤에 승첩탑, 외삼문과 충훈당 가운데에 사당과 내삼문이 보인다.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임란의병 한천전 승첩지> 전경. 사진 오른쪽에 외삼문, 가운데에 충훈당, 충훈당 왼쪽 뒤에 승첩탑, 외삼문과 충훈당 가운데에 사당과 내삼문이 보인다. ⓒ 정만진

선조는 '우리나라 장사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을 몰아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이 1등 공로이고, 그 이외는 권율의 행주 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사람들의 기대에 찰 뿐 나머지는 들어보지 못했다. 간혹 잘했다는 자도 겨우 한 성을 지킨 데 불과하다.' 라고 일갈했다. <선조실록> 1603년 2월 12일자에 실려 있는 말이다.

선조 "영천 수복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맞먹는 승리"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의 한산도 등 수전 대첩, 권율의 행주 대첩, 권응수의 영천 수복을 임진왜란 최고의 승전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수군의 승리와 행주대첩, 그리고 영천 수복의 의의를 강조하느라 그렇게 되었겠지만, 선조는 심지어 1차 진주성 싸움 대첩, 이치 대첩 등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라며 극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선조의 그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영천성 싸움을 잘 알고 있는 후대인은 드물다. 영천성 싸움은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읍성 수복을 위해 영천 지역 의병들은 어떤 준비를 했을까?        

 승첩지 해설
승첩지 해설 ⓒ 정만진

1592년 4월 18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 침략군 2군의 주력 부대는 (경남) 양산과 언양을 거쳐 울산으로 진격했다. 이때 가등청정은 선발대를 보내 21일 경주를 공략했다. 경주는 경계가 수백 리나 되는 영남 최대의 고을이었지만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경주에서 영천까지 80여 리(32km)를 이틀만에 뚫고 지나왔다. 하루에 40리씩을 행군했으니 전투도 없이 그냥 걸은 셈이었다. 영천읍성 역시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적에게 넘어갔다. 일본군이 2만 2천 명이나 된다는 소문을 들은 영천군수는 그 길로 도망쳐버렸고, 영천을 점령한 가등청정군은 지역을 통제할 약간 명의 병력만 남겨놓은 채 (경북 영천) 신녕 쪽으로 북상했다. 그들은 (경북 군위) 의흥, 군위, (경북 의성) 비안, (경북 예천) 용궁을 지나 소서행장의 1군과 조령에서 합류했다.

예로부터 영천은 교통과 군사 요지였다

<선조실록> 1592년 9월 15일 기사는 영천에 남은 일본군이 약 1천 명이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그 1천 명은 당시 사정에 비춰볼 때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직전 영천에 머무르고 있던 조선군은 455명 수준이었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1천 명이 그리 많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1592년으로서는 본래 영천에 주둔하고 있었던 조선군의 2배가 넘는 큰 규모였다.

가등청정이 영천에 1천여 군대를 남겨둔 것은 그만큼 영천이 지리적으로 군사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영천은 927년 견훤이 서라벌의 왕궁으로 쳐들어갈 때 본부를 두었고, 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떠날 때 머물렀던 곳이다. 그만큼 영천은 예로부터 교통 요지였다. 한양, 대구, 부산, 안동, 경주를 잇는 한복판이 바로 영천이었던 까닭에 가등청정은 상당수의 군대를 영천에 주둔시켰던 것이다. (뒤에는 명나라 군대도 영천 신녕에 주둔했다.)

 <임란 의병 한천전 승전탑>
<임란 의병 한천전 승전탑> ⓒ 정만진

그런데 영천에 주둔한 일본군은 가만히 경계만 선 것이 아니라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다. 가는 곳마다 불을 질러 하늘에는 연기가 가득했고, 산까지 뒤져서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을 했다. 심지어 조선인의 묘소를 파헤쳐 값나가는 것을 챙겼다.

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하는 조선인들의 행패도 점점 심해졌다. 일본군은 대나무로 만든 신분증 죽패(竹牌)를 발급했는데, 이를 받으면 일본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군은 죽패를 소지한 조선인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이에 현혹되어 일본에 빌붙는 조선인이 자꾸 늘어갔다. 그중 200여 명은 무리를 지어다니며 조선인을 괴롭혔다. 관청 노비였던 희손(希孫)이 두목이었다.

조선 백성 학살하고 마을 약탈하는 일본군들

4월 27일 이래, 임고서원 건립 주역 정윤량(鄭允良)의 아들로 영천 북쪽 자양에 살고 있던 정세아(鄭世雅), 역시 영천 북쪽 명산리 대전마을에 거주하던 정대임(鄭大任), 그리고 신녕의 권응수(權應銖)가 의병을 일으켰다. 각각 수백 명씩의 병사들을 조직한 세 의병장은 노략질 나온 소수의 일본군들을 대상으로 매복전을 펼치는 방법으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권응수는 본래 경상좌수영 소속 장군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본 수사 박홍이 전함들을 바다에 스스로 침몰시킨 다음 그냥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군대가 해산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그는 전계신 등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키자고 맹세, 전계신은 대구 파잠(수성구 파동)으로 가고 권응수는 신녕 화산으로 왔다.

 사당 백의사와 전사청
사당 백의사와 전사청 ⓒ 정만진

영천 의병이 첫 본격적 승리를 일군 것은 1592년 5월 6일 한천(삼창3리) 전투에서였다. (경북 군위) 의흥 홍천뢰, (경북 경산) 하양 신해 의병군의 지원을 받은 권응수, 정세아, 정대임 부대는 이 전투에서 왜병 13명을 참수하고, 희손 등 부일 반역자 30여 명을 척살했다. 이후 '영천의 치안이 확보되면서 장인(匠人, 기술자)과 산척(山尺, 약초꾼) 등을 (의병으로) 소집하여 의병군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최효식 <경주부의 임진항쟁사>).'

의병군은 5월 18일과 27일에도 적병 15명을 죽이고 20명을 생포했다. 또, 7월 11일에는 당지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그 날, 왜병 2백∼3백 명이 날마다 읍성 밖으로 나와 민가를 약탈하고 다닌다는 정보를 접수한 정대임 의병장은 이번, 박언국, 정천리, 박문이, 벽이 등 장졸들을 성황당봉(신녕향교 뒷산)에 매복시키고, 일부는 와촌 방면에 주둔시켰다. 과연 왜병 300여 명이 신녕을 향해 접근해 왔다. 의병군은 때를 기다렸다가 급습, 일본군 장수 1명을 포함해 20명을 사살하고 40여 명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충훈당 왼쪽 뒤로 승첩탑, 오른쪽 뒤로 사당 내삼문이 보인다. 내삼문 앞의 붉은 문은 충훈당에서 내삼문으로 가는 협문이다. 협문과 내삼문 사이에 길이 있다.
충훈당 왼쪽 뒤로 승첩탑, 오른쪽 뒤로 사당 내삼문이 보인다. 내삼문 앞의 붉은 문은 충훈당에서 내삼문으로 가는 협문이다. 협문과 내삼문 사이에 길이 있다. ⓒ 정만진

7월 14일에도 영천 의병 연합군은 박연(화산면 석촌리)에서 크게 이겼다. 그날 왜군 100여 명이 아군을 속이기 위해 조선 옷을 입고서 군위에서 영천을 향해 내려왔다. 박응기, 류인립 등은 지림원 근처에, 조덕기, 조성, 이설, 김호 등은 요긴한 길목에, 정응거, 허운연 등은 여음동(신녕면 부산리)에 매복하고 있다가 왜적 37명을 죽이고 왜장의 말과 무기 등 40여 점을 노획했다.

그 후 7월 22일에는 하양으로 진격하려는 왜군을 화남 사천에서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권응수, 전삼익, 최인제는 경산 최문병 의병군의 지원을 얻어 왜적들의 대구 가는 길을 끊었다. 또 7월 24일에는 정대임, 권응수 의병군이 군위로 이동 중인 왜병 300여 명을 지림원에서 만나 격퇴시켰다.

연합 전투로 자신감 얻은 영천 의병들, 영천 수복 계획

그런데 이 날은 영천 의병군이 소집된 날이었다. 연합 전투로 연전연승을 거듭해온 영천 의병군들은 박연 승전 이후 확실한 자신감을 얻었고, 영천성 탈환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서 권응수, 정세아, 정대임 등 영천 의병들은 물론, 신녕현감 한개, 의흥 홍천뢰 의병장은 그 전날 이미 영천 주남들판에 당도해 있었다.

24일에는 하양 신해 의병장, 하양현감 조윤신, 자인 최문병 의병장, 경산 최대기 의병장, 경주판관 박의장 등도 속속 당도했다. 선조가 한산대첩, 행주대첩만큼 큰 의의를 지닌 전투로 기억한 영천성 수복 싸움이 곧 펼쳐질 찰나였다.

 한천을 바라보고 있는 외삼문
한천을 바라보고 있는 외삼문 ⓒ 정만진

영천시 화남면 천문로 1749-61(삼창리 36) 일원은 '임란의병 한천전 승첩지(勝捷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한천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겼던 터(址)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승첩탑 외에도 사당인 백의사, 사당 담장 안에 제사 준비를 하는 건물인 전사청,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강당인 충훈당(忠勳堂), 강당 정면 앞의 외삼문이 두루 갖춰져 있다. 동재와 서재만 있으면 완벽한 서원이 될 지경이다. 그러나 동재와 서재는 애초의 건립 계획에도 없었다. 이곳은 서원을 복원한 곳이 아니라 승전을 기념하여 조성된 역사유적지인 까닭이다. 그래서 경상북도 기념물 1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과 비슷한 건물 배치를 보여주는 승첩지

기념물 지정 안내판과 승첩탑 앞 안내판의 내용이 거의 같다. 건립 경과를 덧붙이는 바람에 전문이 길어진 승첩탑 안내판의 해설문을 읽어본다.

'이곳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를 기록한 한천 승첩지이다. 1592년 4월 13일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왜군에 의해 부산 동래성에 이어 울산, 경주성이 함락되고, 아울러 22일 영천성마저 함락되자 4월 27일 지역의 수많은 지사들이 목숨 바쳐 도탄에 빠진 백성과 나라를 구하고자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5월 6일 이곳 한천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둠으로써 후일 영천복성전(復城戰)의 발판을 마련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에 한천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당시 전투에 참가한 100여 명 의사(義士)들의 넋을 위로함은 물론 선열들의 애국애족심을 후세인들에게 선양, 고취시키고 민족정기 함양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당시 창의 의병 후손들을 중심으로 2000년 7월 임란의병한천승첩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경상북도와 영천시의 재정 지원으로 2002년 2월 2일 기공하여 2002년 8월 17일 준공하였다.'

'이곳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를 기록한 한천 승첩지'라고 했다. 이는 5월 7일 이순신의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승첩보다 앞선다는 뜻이다. 물론 육군 전투 중 가장 앞서는 신각의 5월 16일 해유령(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전투와 견줘도 시기적으로 먼저 일궈낸 승리라는 의미이다.

 충훈당 뒷면과 사당 내삼문이 보인다. 서원과는 달리 충훈당과 사당 사이에 길이 나 있어 내삼문으로서는 약간 배치가 특이하다.
충훈당 뒷면과 사당 내삼문이 보인다. 서원과는 달리 충훈당과 사당 사이에 길이 나 있어 내삼문으로서는 약간 배치가 특이하다. ⓒ 정만진

엄진성은 논문 <임진왜란 당시 영천 지역의 유림과 학맥>에서 '유자(儒者)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마음속에 도의(道義)를 가지고 그것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의 의병은 그것을 가장 잘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다.'면서 '말로만 떠드는 가군자(假君子)가 아닌 묵묵히 행동으로 보인 그(영천 의병)들의 행위야말로 혼란에 휩싸였던 조선을 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지적했다.

마음속의 도의를 실천해야 참된 선비

엄진성은 영천 의병 조직의 특성을 '부자, 형제, 친척과 같이 집안 단위로 참가한 의병들이 적지 않다는 점'으로 규정했다. 엄진성이 정리한 임진왜란 당시 영천 지역 의병 선열들의 성함을 가나다 순으로 알기 쉽게 가다듬어 여기 소개한다. '당시 전투에 참가한 100여 명 의사(義士)들의 넋을 위로함은 물론 선열들의 애국애족심을 후세인들에게 선양, 고취시키고 민족정기 함양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백의사 사당과 승첩탑을 세운 분들처럼, 나 또한 같은 생각에서 영천 의병 선열들의 성함을 오늘 옮겨 적는 것이다.

'권응수, 권응평(권응수의 동생), 권건(권응평의 아들), 권응전(권응평의 동생), 권윤(권응전의 아들)
김연, 김대해(김연의 조카), 김한, 김호
노기종, 노준
류몽서, 류영회, 류인립, 류의립(류인립의 동생)
박봉상, 박사신, 박언국, 박응기, 박인로
서경택, 서경함, 서도립
성립, 성훈, 성적(성훈의 동생)
손덕심, 손덕순(손덕심의 동생), 손응현
신응국, 신준룡
유옥경
윤담, 윤종선, 윤취선(윤종선의 동생)
이간, 이국빈, 이군빈(이국빈의 동생), 이득린, 이득봉, 이설, 이영근, 이영간(이영근의 동생), 이온수, 이일장, 이정분, 이준, 이인(이준의 동생), 이지암, 이지효, 이철견
전복명, 전억주, 전영제, 전익, 전삼락, 전삼익(전삼락의 동생), 전삼달(전삼익의 동생), 전삼성(전삼달의 동생)
정광윤, 정담, 정대임, 정대인(정대임의 육촌동생), 정석남(정대임의 5촌조카), 정대효, 정천리(정대효의 아들), 정도준, 정득현, 정사상, 정사진(정사상의 동생), 정사악(정사진의 사촌동생), 정세아, 정안번(정세아의 아들), 정의번(정세아의 아들), 정운화, 정응민(정운화의 아들), 정응서
조덕기, 조일기(조덕기의 동생), 조시언, 조이정, 조이함, 조이항, 조종악, 조준기, 조성, 조경(조성의 동생), 조희익, 조이절(조희익의 아들)
지득곤, 지언평
최응사, 최벽남(최응서의 아들), 최인제'

한천전 승첩지의 사당은 백의사(百義祠)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 모셔져 있는 위패는 그보다 훨씬 적다. 자녀가 없는 상태에서 전사했거나, 혹은 이름 석자를 남기지 못해 저절로 실명(失名)이 되어버린 분들이 많아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엄진성 논문에 등장하는 선열들의 명단 끝에 임의로 '임란(壬亂) 한천전(漢川戰) 의사(義士) 무명(無名) 제공(諸公) 신위(神位)'를 써서 붙인다.


#한천전#권응수#정세아#정대임#영천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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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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