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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훔친 것 같은데

며칠 전(7월 4일) <오마이뉴스> 오름으로 <학생이 훔친 것 같은데…어찌할까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았다. 사실 평생 학생의 처지에서 배우고, 교사의 처지에서 가르쳐온 나로서 교내에서 일어나는 도난 문제에 가장 난감했다. 그래서 나는 이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기사 요지는 어느 대학 강의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한 영화과 교수가 강의실에서 노트북을 두고서 볼 일을 보고자 건물 밖에 나갔다가 한참 후 돌아와 보니 노트북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 교수는 어느 학생이 훔쳐간 것으로 단정하여 수소문을 하고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내는 소동 끝에 노트북을 찾은 얘기와 그 노트북을 가져간 학생에 대한 연민 등을 제삼자가 쓴 기사였다.

나도 배우고 가르치는 50여 년 동안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하거나 또는 내가 교사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를 여러 번 겪었다. 교사 초년시절은 이런 일에 법석을 피우며 잘못한 학생을 공개적으로 야단을 친 일이 있었는데, 곧 그게 교육자로 크게 잘못인 것을 깨달았다.

이후에는 이런 문제가 일어나면 조용히 처리하거나 때로는 아예 묻어버리거나 지나쳐 버렸다. 그것은 교육자는 여하한 경우라도 자기가 가르치는 제자를 도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 기사에 나는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이 글은 더 덮어두었다가(최소한 10년 이상) 그 학생의 동의하에 발표되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선의로 쓴 글로 여길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자기를 지목한 것으로 알 것이며, 또 다른 아픔을 낳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부주의한 교수의 책임도 크다. 그냥 넘어갈 일을 이렇게 까발리는 그는 진정한 교육자답지 못하다. 도와주려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도와주라. 사려깊지 못한 한 천박한 교수의 처신을 엿본 것 같다."

이 댓글에 반론 댓글이 달렸다.

"그냥 넘어간다면 학생이 무엇을 배우고 느끼게 되나요? 어떤 학생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개인의 고민을 적은 글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건가요? 사려 깊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 직접 보여주시길…."

이 댓글을 그냥 지나치려다가 마침 신간 준비 원고에 참고될 만한 글이 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서 겪었던 도난사고와 이를 슬기롭게 넘기신 당시 구미초등학교 곽태조 담임선생님의 높으신 가르침 이야기다.

 현재 구미초등학교 교사, 뒤로 금오산이 보인다. 1950년대 필자가 다녔던 때의 교사는 아니다.
 현재 구미초등학교 교사, 뒤로 금오산이 보인다. 1950년대 필자가 다녔던 때의 교사는 아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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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로 수학여행을 가다

나는 중학교까지 고향 구미에서 다녔다. 지금 돌이켜봐도 유소년 시절을 시골에서 지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내가 늘그막까지 글줄을 쓰고 사는 것도 아마 그 원천은 그 시절을 대자연과 더불어 산 덕분일 것이다. 나는 38선 부근에서 한국전쟁이 한창 계속되던 1952년 봄에 구미국민학교(현 구미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는 의무교육이라고 했지만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미취학자가 더 많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초가로 된 임시교사에서 맨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책상도 없이 배웠다. 대부분 학동들은 바지저고리로 책보를 들고 다녔고, 미군들이 나눠준 분유를 끓여 간식으로 먹거나 그것을 지급받아 집에서 쪄 먹기도 했다.

그 시절 서울 같은 도시학교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상급학교 진학준비로 가장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지만 우리 촌동(村童)들은 그런 입시공부 열풍에는 무풍지대로 날마다 농사일을 돕거나 아니면 촌동들끼리 몰려 신나게 놀기만 했다.

서울은 먼 나라로 가본 아이들은 거의 없었고, 서울말씨는 경외의 대상으로 서울을 다녀온 사람이 서울 이야기를 하면 넋을 잃고 들었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다 보니 봄가을 소풍은 으레 금오산으로 6년 동안, 아니 9년 동안 그곳으로만 갔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봄 소풍 때  김천 직지사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은 전세버스는 없었거니와 그런 버스를 타고 갈 만큼 경제적인 형편도 도로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열차를 타고 갔는데 학교에서는 아이들 집안형편을 고려하여 열차비만 거뒀고, 절에서 1박하는 숙식비로 쌀 한 되를 각자 지참케 했다.

우리 촌동들은 각자 보자기에 쌀 한 되를 지참하고 구미 역에서 서울행 상행 완행열차를 탄 뒤 40분 쯤 지난 뒤 직지사 역에 내려 거기서 2킬로미터 남짓 걸어 직지사에 이르렀다. 그때 처음으로 열차를 타본 아이들도 꽤 많았다. 숙소는 직지사 큰 선방이었는데 가운데는 담임선생님 두 분이 가로 누우시고 양쪽으로 남녀 학생들이 옹기종기 몰려 잠을 잤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으로 그때 천불상을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으로 그때 천불상을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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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선생님의 침묵

밤이 이슥하도록 아이들은 잠을 자지 않고 소곤거렸다. 그때 장터 포목상집 아들 이 아무개 녀석이 돈 5백환(현재 1만 원 정도)을 도둑맞았다고 담임선생님에게 일렀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은 남학생을 모두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여 앉힌 뒤 눈을 감긴 다음 돈을 주운 학생은 손을 들라고 했다.

아무 학생도 손을 들지 앉자 담임선생님은 현재 자기 호주머니에 5백환 이상 가지고 있는 학생은 손을 들라고 했다. 그러시면서 선생님은 아무도 나오지 않으면 곧 전원 소지품을 검사할 거라고 했다. 세 학생인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은 세 학생을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간 뒤 가지고 있는 돈의 출처를 물었다. 그때 나도 그 세 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담임선생님은 가장 먼저 나에게 물었다.

"박도! 너 그 돈 누가 준 거야?"
"할매가 줬습니다."
"알았다."

담임선생은 다음 성아무개 학생한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 어무이가 찻간에서 뭐 사먹으라고 줍디다."
"알았다."

담임선생은 마지막 조아무개 학생한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제대로 대답을 못한 채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러자 담임선생은 갑자기 채근을 중단하고 세 학생을 큰방으로 보낸 뒤 전체 학생들에게 모두 입을 다물고 어서 자라고 명령했다.

직지사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은 5백환을 이아무개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한 말씀을 했다.

"어제 아침 직지사 행자스님이 방을 청소하다가 돈 5백환을 주웠다고 나에게 주더구나. 이 아무개가 잃어버린 돈 같아 받아왔다."

담임선생님은 더 이상 아무 말씀이 없었다. 


#교내 도난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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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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