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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책이다. 이 책 속엔 이야기에 대한 근원적 의미를 탐색하는 작가의 철학적 사색이 짙게 녹아있다. 이야기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범한 일상에서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 문학적 상징과 은유로 점철된 아름다운 문장들이 정교하게 짜여있다. 또한 작가의 시선에 포착된 다양한 무늬를 가진 삶의 이야기들이 묵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 책을 가로지르는 중심은 리베카 솔닛의 어머니를 향한 고백이다. 한 인간으로 어머니를 이해하기까지,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세상의 대한 다른 이야기였다. 소설과 동화, 미술작품 속에 깃든 상상만이 아니라 삶의 길목에서 만난 이웃들의 이야기까지, 모두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솔닛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 평범한 일상적인 대화만이 아니라 가슴 속에 은밀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꿰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찬란한 구슬이 아니더라도 하루를 버텨오며 흘린 땀방울을 담담하게 꿰어가는 것이다.

이야기는 혼잣말과 다르다. 솔닛은 "이야기의 숲과 고독 너머에는 건너편이 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와 사람은 구조적으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이야기를 읽어줄 사람 혹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이야기는 한낱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이야기에는 어떤 감정이 스쳐간다. 이야기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지만, 어떤 감정이 이야기를 초대할 때도 있다. 이야기는 사건이 지난 후에도 그 순간의 감정을 또렷이 재현해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감정을 솟아나게 한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진화해 본래의 틀거리에서 변형된다.

이야기는 사람들을 낯선 미지의 세계로 빠져들게도 하고, 잊었던 익숙한 존재를 다시 불러들이기도 하며, 어떤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이야기 주변으로 모여드는 감정의 조각들을 따라가면,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몰입하는 순간과 마주한다.

우리가 직접 겪지 않았지만 자신이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감정이 되살아나는 감정이입의 고차원적인 세계. 솔닛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에서 나와 여행하는 일이며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의 전부를 경험할 순 없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읽어낼 능력을 갖고 있다. 그 순간의 감정이입을 통해 타인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만드는 신비한 마법의 시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100쪽)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집 <멀고도 가까운>의 겉표지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집 <멀고도 가까운>의 겉표지
ⓒ 우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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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대로 이 책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의 가정사나 혁명가 체 게바라 또는 죽어가면서 남긴 친구의 마지막 미술작품 혹은 책이나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까지. 

이런 복잡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어머니와 딸에 대한 숙명적인 이야기였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텅 빈 어머니의 집 살구나무에서 추려낸 100파운드의 살구 상자가 솔닛의 집으로 배달되었다. 보호시설에 있는 어머니 대신 그녀에게 맡겨진 살구는 그녀의 집 침실을 차지해버린 낯선 침입자였다. 살구는 그녀에게 "풀어야만 할 수수께끼"였고, 어떤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놓게 하는 "촉매제"였다.

평생 어머니를 쫓아다닌 정체모를 시기심과 불안감은 솔닛에게로 그대로 투사되었다. 딸을 당신의 거울로 삼아버린 어머니는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다줄 유리 구두를 기다렸다. 어머니에게 어울리는 동화가 있다면 그건 바로 <신데렐라>일 것이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은 사랑받지 못한 우울한 잿빛이었다.

거울에게 돌아올 목소리는 단 하나였다. 투덜거리는 원망과 불만의 소리들. 그런 소리들에 짓눌려 불안할 때면, 솔닛은 책을 읽기 위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녀에게 도서관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성지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지휘소"였다.

솔닛의 침실 바닥에 카페트처럼 깔려있는 살구더미에서 진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버려두면 썩어 문드러질 수밖에 없는 살구더미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했다. 100파운드의 살구가 가르쳐준 단순한 진실. 그건 무엇이든 마냥 바라보기만 하면 썩어버려 고약한 악취를 풍긴다는 것이었다.

삶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딸보다 아들을 더 사랑했던 어머니도, 평생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했던 어머니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을 때가 있었다. 그녀는 썩은 살구를 골라냈다. 살구잼과 살구통조림을 만들었다. 집안에 진한 살구향이 퍼졌다. 이젠 어머니의 이야기에 공감의 고갯짓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언어를 배우고, 사물의 이름을 익혔다. 그런 어머니와의 단절은 솔닛으로 하여금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리게 했다.

거울이 되어 침묵의 고요 속에 빠져있던 그녀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 솔닛은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고 했다. 어머니를 비춰주었던 작은 거울이 세상 전체를 비춰주는 커다란 창으로 변한 셈이었다.

이 에세이에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솔닛 그녀 자신의 내면을 성장시킨 이야기였다. 감정이입이라는 정신적인 경험을 통해, 그녀는 한 인간으로서의 어머니에 대해 진심어린 이해와 사랑을 확인했다.

어떤 이야기는 감정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상대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자신에게 그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물어보는 것이다.

"내가 바늘이 되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내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세상이 꿰매지고 있는 것 같은 상상. (중략) 꾸불꾸불한 선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하나로 합쳐 나가는 것이, 마치 그 걸음이 바느질이고, 바느질은 곧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며, 그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삶인 것 같다." (193쪽)

한 땀 한 땀 이야기를 지어가는 고독한 작가의 숙명을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한 글이 아닐 수 없다. 읽기와 쓰기의 고독은 세상의 수많은 섬들 사이로 흘러들어간다. 책은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어떤 이야기를 읽고 있는 당신의 자아란 세상의 여러 갈래에 놓인 문을 통과해 넓은 곳으로 시선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의 가슴 속엔 풀리지 않는 단단한 매듭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매듭은 따뜻한 숨결의 온기로도 풀어지고, 아름다운 동화의 한 장면 속으로 사라질 때도 있다. 세상 전체가 북극의 얼음처럼 느껴질 때에도, 그 차가운 고통 때문에 필사적으로 따뜻한 온기를 찾아다녔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어느 날 불쑥 찾아온 한 알의 살구가 코끝을 자극했던 그 처음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책을 펼치지 않아도 터치 한 번만으로도 수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식상한 이야기에 웬만해선 감정이 움직이질 않는다. 빠른 속도의 전개와 자극적인 소재가 아니면 한 줄의 문장도 버거운 요즘 같은 세상에, 이야기의 의미와 가치를 파고 들어가는 솔닛의 책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가 흩어져 있는 섬이 아님을 확인했다. 나만의 비밀을 털어놓고, 실화의 감동이 깃든 이야기를 읽으며 살아있는 존재의 고독을 훌훌 벗어던졌다. 이야기, 그것은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따뜻한 포옹이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악수였다.

이 책은 아름다운 사랑의 세레나데였다.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서로의 가슴에 공감의 기류가 흘러들어가, 세상의 이야기를 자기 삶의 울타리로 불러들이는 것. 이야기를 읽고 쓰는 혹은 듣고 말하는 궁극의 지향점이었다.

덧붙이는 글 |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반비/ 값 17000원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반비(2016)


#<멀고도 가까운>#리베카 솔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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