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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오르세 미술관
파리 오르세 미술관 ⓒ 김윤주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이 있는 뮤제 도르세(Musee d'Orsay) 역으로 가든지 갈아타지 않고 한 번에 가는 솔페리노(Solférino) 역으로 가든지 내키는 대로 하자 싶어 일단 호텔을 나선다. 몽파르나스역에서 초록색 12호선을 타고 5개 역만 가면 솔페리노역이다. 이렇게 가까운데 왜 이제야 나섰는지 모르겠다. 파리의 예정된 날들이 줄고 있다. 어쩔 줄 모르겠다.

파리의 지하철은 역과 역의 구간이 너무 짧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아상블레 나쇼날(Assemblée Nationale)역이다. 아차! 깜짝 놀라 뛰어 내리려 했을 땐 이미 늦었다. 게다가 파리 지하철은 승객이 직접 손으로 스테인리스 레버를 돌려야 문이 열리도록 되어 있다. 그나마 어찌나 뻑뻑한지 아주 힘차게 젖혀야 겨우 열린다. 간혹 차량에 따라 버튼을 누르게 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심지어 고마울 지경이다.

야속한 잠금 장치를 서둘러 열고 부리나케 뛰어내렸지만 이미 역을 하나 지나 버렸다. 어차피 구간 거리가 짧아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 정거장을 거슬러 돌아가느니 그냥 역을 빠져나가 걷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오후에 회의와 수업 참관이 잡혀 있어 안 그래도 시간이 빠듯한데 이게 뭐람.

좁고 어두운 통로와 계단을 씩씩거리며 걷는다. 시계를 살피며 투덜투덜 바쁜 걸음으로 지하를 빠져나오는데, 역 밖으로 나오는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올라서니, 아, 노란 빛의 따뜻한 가을 햇살, 그 아래 다시 또 연회색 아름다운 파리의 골목길이다. 이놈의 파리에선 젠장, 어떤 것도 용서가 되니 어쩌란 말이냐.

 오르세 미술관 가는 길
오르세 미술관 가는 길 ⓒ 김윤주

늘씬한 라틴계 여인을 마주쳤다. 오르세 미술관을 물었다. 파리에 온 후로는 길에서 헤매는 시간이 절반이고, 파리지앵이든 파리지엔느든 이곳 사람들을 마주하고 행하는 의사소통 활동의 절반은 '길 묻고 대답 짐작하기'이다. 때마다 수월하게 목표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눈빛과 손짓과 억양과 간절함은 기본이다.

"오르세라...... 음, 이 길을 쭉 가다가 앞에 가로지르는 길을 만나게 될 거야. 그렇게 네 앞을 가로지르는 길이 세 개째 되는 지점에서 딱 왼쪽으로 돌면, 그럼 바로 오르세가 나타날 거야. 세 번째. 가만 있자......"

까만 눈망울을 굴리며 주먹 쥔 손가락을 엄지, 검지, 중지까지 하나씩 펴 올리면서 하나, 둘, 셋. 하늘도 한 번 올려다보고 눈을 몇 번인가 깜박이는가 싶더니 새초롬한 입을 열어 아까보다 제법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다시 대답한다.

"맞아. 세 번째야. 확실해. 거기서 왼쪽으로 한 번만 돌아, 알았지?"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들은 대로 직진을 한다. 쭉쭉 앞으로 걸어가며 길모퉁이 건물 벽에 써 붙어 있는 재미난 길 이름도 한 번씩 올려다보고, 창문마다 놓여 있는 예쁜 화분과 장식들도 구경하고, 회색빛 지붕 위 건물들 사이로 조각하늘도 올려다보면서 골목골목을 걷다 보니 아차! 또 사고다.

세 블록을 지났는지 네 블록을 지났는지 그만 잊어 버렸다. 그렇게 살뜰하게 다짐을 해도 매번 이 모양이다. 간절한 눈빛에 애교 섞인 목소리로 길을 묻고 미간에 주름 잡고 애써 답을 듣고 나선, 결국엔 늘상 이렇게 다시 또 길을 잃게 된다. 목적지에 집중하기보다 지금 걷는 이 거리에 더 정신을 팔게 되는 이상한 도시 파리.

어쨌거나 무사히 도착했다. 오르세 미술관의 뒷골목. 빨간 차양이 예쁜 카페와 작고 고소한 빵집이 오르세 이름을 내걸고 손님을 맞고 있다. 미술관 앞 너른 광장은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이 북적인다. 그림을 보러 왔기보다 누군가와의 약속을 앞둔 이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품새다.

11유로 입장권을 끊는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16유로에 오랑주리 미술관까지 갈 수 있는 콤보 티켓이 있었는데 4유로를 절약할 기회를 놓친 꼴이다. 잠시 후회도 했지만 오랑주리는 결국 다음날 헤매다 못 찾고 포기해야만 했다. 모네의 수련 연작으로 유명한 오랑주리는 애초에 못 볼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기차역을 개조한 파리 오르세 미술관
기차역을 개조한 파리 오르세 미술관 ⓒ 김윤주

오르세는 기차역을 개조한 미술관이다. 1900년 만국박람회 당시 전시장으로 쓰기 위해 문을 연 것을 이후 기차역으로 쓰다가 1986년 미테랑 대통령 당시 미술관으로 다시 문을 연 것이다. 매표소와 서점을 지나 넓은 홀에 들어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여전히 영락없는 기차역 플랫폼의 모습이다. 회색빛 연기를 내뿜으며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오를레앙에서 출발한 기차가 분주히 드나들었을, 한때는 현대적이었을 거대한 기차역.

아치형 천정과 황금빛 벽면을 온통 뒤덮고 있는 유리창들과 철제 골조, 자연 채광 가득한 넓고 시원한 공간, 스콧 피츠제랄드의 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연상시키는, 맞은편 멀찍이 높이 걸려 있는 둥글고 화려한 대형 벽시계까지 전형적인 기차역의 흔적이다.

마네, 모네, 세잔,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 시슬리, 모리조, 고흐, 고갱, 로트렉까지 오르세 미술관엔 우리가 좋아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낯익은 작품들이 마치 생맥주집 구석에 성의 없이 뜯겨진 채 걸려 있는 흔하디 흔한 달력처럼 넘치도록 걸려 있다. 미술관이라면 도통 지루해서 마땅치 않은 사람이라도 이곳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웬만해서는 지루하기조차 쉽지 않다. 미술에 내가 이렇게 조예가 깊었나 싶을 만큼 반가운 그림들이 홀마다 벽마다 가득하기 때문이다.

2월 혁명이 있었던 1848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 회화, 조각, 공예 등의 작품이 두루 전시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이보다 이전 시기의 작품들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후의 작품들은 퐁피두 센터에서 담당하고 있다. 루브르나 퐁피두보단 오르세에 오래 머물고 싶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앵그르의 <샘>이나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와 <오르낭의 매장>, 밀레의 <만종> 등과 같은 대작부터 앙리 마티스의 그림들까지, 따지고 보면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는 물론 바르비종파와 인상주의 이후 야수파에 이르기까지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회화사를 형성하는 굵직한 사조의 주요 작품들이 모두 모여 있음에도 사람들은 오르세를 유독 인상주의 미술관으로 기억한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파리 오르세 미술관 ⓒ 김윤주

그도 그럴 것이 5층짜리 미술관의 상당한 공간이 인상주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1층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올랭피아> <피리 부는 소년> 등을 시작으로 5층의 기다란 인상주의 갤러리에 이르면 미술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역사를 만들어낸 일군의 예술가들을 모조리 만날 수 있다. 하나하나 애틋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들의 수많은 작품들도 질리도록 들여다볼 수 있다. 

평론가들로부터 '인상주의'라는, 조롱 가득한 '혹독한' 이름을 얻게 된 1874년 제1회 전시회부터 마지막 단체전이 된 1886년 제8회 전시회까지, 인상주의 화풍의 형성기부터 20세기 초까지를 시기별, 작가별, 주제별로 구성해 두어 방 하나하나를 옮겨갈 때마다 아쉬움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2층 고흐와 고갱 홀을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미술관을 거닐다 보면 그림을 세라도 낸 듯 점령하고 앉아 토론 중인 단체 학생 관람객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 성인까지 연령대도 그룹의 규모도 다양하다. 어린아이들이 번쩍번쩍 손을 들고 질문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모습이 그림만큼이나 인상적이다. 바닥에 앉아 친구와 깔깔거리다가도 그림 이야기를 나눌 때는 하나같이 진지한 표정이다.

부럽다. 이 좋은 곳엘 이렇게 수시로 들락거리며 놀고 있다니, 그 긴 세월을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고 얼마나 좋을까. 그것도 혁명과 자유, 민중과 투쟁, 도전과 모험, 사랑과 정의, 인생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들이 아니던가. 나오는 길에 들른 서점에선 하필 낯선 언어들 틈에 한국어 가이드북만 보이질 않는다. 안 그래도 샘이 나서 퉁퉁 부은 마음이 더욱 무거워져 버렸다.


#파리 여행#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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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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