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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화에서 이어집니다)

그는 양치기 소년처럼 양떼 같은 무리들을 가까운 도쿄대 혼고캠퍼스 근처 맥줏집으로 몰았다. 여남은 명 사람들이 삼삼오오 자리 잡는다. 맥주가 한두  순배 정도 돌아가자 중구난방이란 말이 들어맞는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어서인지 그들만의 서열을 정하기 위한 이런저런 말들이 오간다. 그런 사이에 김원택과 '태풍의 눈'은 자못 심각하게 얘기를 나눈다. 그러다가 '태풍의 눈'의 실제 눈이 정말 유난히도 빛난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는 듯 좌중을 휘어잡는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은, 더 이상 두고 봐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입니다. 우리 평화로운 일본에 이른바 '헤이트 스피치', 특히 한국인을 포함한 다른 아시아 나라 사람들에게 겁을 주거나 협박을 하는 짓이 이제 일상이 돼 버렸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서 보수 우익 집단들은 버젓이 폭력행위까지 저지르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 같은 모습을 빤히 보면서도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 피해는 이제 또는 앞으로 같은 일본인에게까지 미치고 있고, 미칠 것입니다. 지난 번 우리는 보안법제 개정은 물론 헌법 개정 때도 항거했지만, 현상을 뒤집기에는 한참 못 미쳤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뿌린 대로 거둡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는 똑같이 우리 일본인에 대한 미움으로 되돌아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인을 포함해 외국인들을 못 살게 구는 일을 막아야 합니다. 또한 정부와 여당의 전쟁을 향한 행진을 멈춰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우리는 물론 우리 후손들 미래는 잿빛입니다. 축복이 아닌 재앙만 남습니다.

최소한 우리부터, 먼저 도쿄부터 앞장섭시다. 그리고 오사카, 나고야, 교토 등 다른 곳으로 확산시켜 나갑시다. 우리, 여러분만이 더 이상의 불행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뭉칩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1938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히틀러가 수 만 명 당원들 앞에서 내뿜었던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연설을 떠올릴 정도다. 사자의 모습이다. 놀라운 반전이 강마르게 보이는 '태풍의 눈'에 숨어 있던 것이다.

 1938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 해 전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는 전쟁으로 치닫는 광기를 보였다.
1938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 해 전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는 전쟁으로 치닫는 광기를 보였다. ⓒ 라이프

뉘른베르크는 히틀러 집권시기 나치 전당대회가 열렸던 독일 한가운데에 있는 도시다. 1935년 '뉘른베르크법(인종차별법)' 제정으로 나치의 인종차별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더욱이 전후 나치 전범을 단죄하는 국제재판이 열린 곳이라 돌고 도는 역사를 증명하는 도시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런 상징성을 '태풍의 눈'에 억지로 대입시켜 본다. 그의 강한 의지가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표현된 곳이 여기 도쿄다. 그는 도쿄의 온라인 사람들을 오프라인에서 모아서 '반인륜적인 타민족 혐오 행위'와 '군국주의로 회귀'를 막고자 깃발을 올린다.

정치인이자 학자인 모이제스 나임이 저서 '권력의 종말'에서 얘기한 것이 증명된다. 권력이 더 이상 국가나 정부의 전유물이 아니라 개인 혹은 소규모 집단이나 작은 기업이 향유하는 것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적절한 케이스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인터넷과 같은 온라인 의사소통 때문이다. 현대사회라는 바다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섬으로 떠다니는 개인이 온라인 의사소통을 통해 한 곳, 광장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것도 도쿄에서 말이다. 1945년 종전 이후 합당한 단죄가 아닌 불충분한 전후 처리로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킨 전범에 대한 '도쿄재판'이 열린 곳이다. 거짓과 미봉에 휩싸인 채 안으로부터 곪아간 전체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상처가 덧난 곳이다. 이제 그로 인해 다시 타오르려는 증오의 악덕과 맹목의 백치를 잘라내려는 칼을, 대중이, 네티즌이 '태풍의 눈'이라는 새로운 대표자를 통해 뽑아 들었다. 일본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모든 것을 정리하려는 불꽃이 지금 막 댕겨진 것이다.

일본 역사상 민중들이 뜻을 함께해 일어난 '잇키(一揆)'가 커져 '난(亂)'으로까지는 몰라도 일본 내부에서 시민들을 중심으로 정부에 맞서 자연 발화한 보기 드문 사례가 현재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일본에서 격렬한 사회주의 학생운동이 사라진지 40여년만의 일이다.

인터넷, SNS 등 온라인이라는 것은 불과 같다는 어느 학자의 논리가 증명된 셈이다. 익명성 뒤에 숨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심한 악담을 퍼부어 당사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가 하면, 인간의 나약함을 틈타 거짓 정보나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고, 영화 <다이하드 4>에서 볼 수 있듯 해킹을 통해 국가 네트워크를 파괴해 미국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온라인이다. 사람과 세계를 불태울 수 있는 위험하고 믿지 못할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영화 <다이하드 4>에서는 컴퓨터 해커들이 미국 전역의 교통-금융-통신-전기 네트워크를 파괴해 미국이 공황상태에 빠진다
영화 <다이하드 4>에서는 컴퓨터 해커들이 미국 전역의 교통-금융-통신-전기 네트워크를 파괴해 미국이 공황상태에 빠진다 ⓒ 영화 '다이하드 4'

그러나 인간이 갖는 미덕인 양심과 자유, 불의에 대한 저항 등이 단순히 개인에 그치지 않고, 집단적으로 실체를 갖추게 만드는 동시에 현실에서 참여하는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것 또한 온라인이다. 2010년 말 불타올랐던 민주화 들불인 '아랍의 봄'에서 확인했다. 그리고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아마 역사에서 온라인 운동의 긍정적인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전해질 것이다.

미키는 보도본부장에게 사직서를 낸다. 겉으로는 동북수용소 취재 불가에 대한 반발이다. 하지만 속내는 다르다. 회사에 매여서 여론을 속이는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것보다 아예 프리랜서로 나서서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는 어리석은 짓거리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토 기자, 왜 그래?"

"일신상의 이유일 뿐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사직은 좀 섣부른 것 아닌가? 당신이 우리 회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봐도, 한참 중견 기자로서 실력을 발휘해서 후배들의 귀감이 될 사람이 무작정 사표를 내는 것은 좀 무책임하다고 보네."

"최소한 기자로서 이 사회의 부조리를 눈감는다는 것이 더 무책임한 일 아닌지요. 최소한 직업적인 윤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직서를 낸 것뿐입니다."

"동북수용소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그것을 못 견디겠다고 하는 얘기라면, 한번 다시 생각을 해 보게. 그게 전체 우리 회사 방침이야."

"그러니까요. 그런 언론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책임 회피도 모자라 정부 방침에 충실한 개가 돼 언론이기를 포기한 회사, 그만두는 게 양심적입니다."

"아니, 뭐야? 너무 막 나가는 것 아닌가? 그럼 여기 있는 사람 모두 개자식이라는 얘기야? 참으로 민폐를 끼치는 얘기네. 여하튼 그럼 일단 휴가를 내든지, 휴직을 신청해. 당신 사직서는 내가 홀딩하고 있을 테니까. 언젠가 오늘을 부끄러워 할 걸세. 인생 선배로서 해 주는 마지막 부탁일세."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분명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토 기자, 이토 미키!"

보도본부장의 성난 목소리를 뒤로 하고, 미키는 종이 박스에 소지품과 책을 챙긴다. 좋은 인연이 안 되는 회사를 떠나고야 만다.

'패트릭 기자님, 저 오늘 회사 그만 뒀습니다. NYT 파트 타이머직 하나 소개해 주세요. 다만 조건은 여기서 일본 소식을 필명으로 전하는 도쿄 특파원으로요. 지난 번 기사는 참 고마웠습니다. 그 기사에 이어 속보를 쓸 수 있게 다시 자료를 모아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일본은 외신도 철저하게 통제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NYT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은 하나도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아참, 선배, 베를린 특파원으로 있었죠? 독일 언론 쪽에 아는 사람들 있습니까? 독일과 일본, 요즘 앙숙인 거 알죠? 독일 쪽에서 일본의 과거사 은폐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을 하면서 일본 전체의 심기가 불편해 졌거든요. 그래서 독일을 레버리지 삼으면, 꽤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이 확실합니다. 바로 연락해 주세요. 가능하면 자주 소식 주고받고요. 무엇보다 건강하시고요.'

미키는 미국에서 알게 된 대학 연합 동아리 선배 일본계 미국인 패트릭 가와구치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갑자기 속이 메슥거린다. 토할 것 같다. 화장실로 뛰어간다. 변기에 구토한다. 눈물은 눈물대로, 콧물은 콧물대로 나온다. 입덧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 무기력했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하루 종일 회사에서 졸리고, 피곤했던 모습을 떠올린다. 임신 2개월 째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증상이다.

문득 수년 전 읽었던 외신 기사가 떠오른다. 미국 여배우 제니퍼 애니스톤이 45세의 나이에 평생 간절히 염원하던 아기를 갖게 됐는데,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극심한 입덧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산에다 노산(老産)인 나이에 기적이라며, 무척 행복해 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에게도 큰 선물에 대한 작은 고통을 안기는 모양이라고 스스로 달랜다. 미키는 엄마에게 전화한다. 임신 사실을 알린다. 엄마가 득달 같이 달려온다. 신맛과 단맛을 가득 머금은 한국 제주산 '한라봉' 감귤을 사왔다. 누워있는 미키를 쓰다듬는다.

"미키가 정말 여자가 됐구나. 엄마도 미키를 가졌을 때 입덧을 심하게 했단다. 너에게도 그게 그대로 전해졌나 보다. 미안해, 미키. 좋은 것만 네게 줬어야 했는데 나쁜 것도 고스란히 전해줘서. 내 딸, 아기가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딸이면 좋겠어?"

"아빠를 닮은 아들이면 좋겠어요."

"엄마는 딸이면 좋겠다. 미키 닮은. 그나저나 미키, 집으로 가자. 너 혼자 임신한 몸을 건사하려면 힘들어. 엄마가 너 가졌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는 모르지? 아빠는 사업으로 늘 바쁘셨고 외할머니도 교토에 계셔서 오시기도 어려웠지. 너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엄마와 같이 들어가자. 응?"

미키는 극구 거절한다.

"안 돼요. 그이가 나 없을 때 찾아오면 어떡해요? 그래도 제가 이 집에 남아서 그이를 맞아줘야죠. 지금 저보다 그이가 더 힘들 텐데요."

"아니, 그래도 아이를 먼저 생각해야 돼. 혼자서 있으면 심리적으로도 안 좋고. 먹는 거나 제대로 챙겨 먹겠어? 글을 남기면 되잖니?"

"……."

아기 얘기가 나오자 미키는 더 이상 엄마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K에게 글을 남긴다. 문 앞에, 식탁에, 냉장고 문까지 세 군데에 같은 내용을 '포스트 잇'에 남겨 붙여놓는다. 둘만의 빈집을 뒤로하고 엄마 집으로 향한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모이제스 나임#권력의 종말#도쿄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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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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