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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렵게 학교를 다니던 30년 전 제자들이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되어 함께 져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박상용(왼쪽) 여수새마을협의회장과 박미덕 국제와이즈맨 클럽 여수앙상블회장
어렵게 학교를 다니던 30년 전 제자들이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되어 함께 져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박상용(왼쪽) 여수새마을협의회장과 박미덕 국제와이즈맨 클럽 여수앙상블회장 ⓒ 오문수

20일 전인 11월 중순, 30년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이 동창회를 한다며 나를 초청했다. 배도 나오고 머리도 벗겨지고 대학생 자녀들과 결혼까지 시킨 제자들도 있었다. "아! 같이 늙어가는 구나!" 하며 강당으로 들어서려는데 안내를 맡은 제자가 "선생님 저 미덕이에요. 저 아시겠어요? 제가 시집을 냈어요"라며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동창회가 끝난 며칠 후 미덕이한테서 "오빠(박상용)랑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는 전화가 왔다. 미덕이가 학창시절부터 오빠라고 부르던 박상용이는 신참 여교사보다 나이가 많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진짜 오빠가 아니라 나이가 많아 부르던 호칭이라는 걸 알았다.

셋은 필름을 30년 전으로 되돌려 깔깔거리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당시 여수상고에는 주간과 야간 외에도 특별학급이 있었다. 야간에 다니는 학생들도 가난하지만 특별학급 학생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가난했다.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늦게 학교에 들어와 다른 친구들보다 5~6살 많은 학생도 있었다.

 글솜씨가 있으니 국문학과를 가보라고 권했다는 내말에 자신감을 얻어 글쓰기를 시작해 시인이 된 박미덕 제자의 시집 <그리움은 그리움끼리>
글솜씨가 있으니 국문학과를 가보라고 권했다는 내말에 자신감을 얻어 글쓰기를 시작해 시인이 된 박미덕 제자의 시집 <그리움은 그리움끼리> ⓒ 오문수
특별학급 학생들 대부분이 섬 출신이거나 아버지와 어머니 중 한쪽이 안 계셔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공장기숙사에서 다니는 학생도 있었다. 이들 학비는 정부에서 보조해줬지만 생활비는 자신이 벌어야 했기에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야간에 등교했다.

그 중에는 초등학교 입학 1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비인가학교인 재건중학교를 나와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다른 친구보다 2년 늦게 들어온 박미덕 학생이 있었다.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심부름하고 저녁에 학교에 나온 미덕이는 똑똑하고 야무진 학생이었다.

아픔 없는 학생처럼 생글거리며 공부 잘했던 미덕이는 글짓기 시간이나 학예회가 열리면 항상 두각을 나타냈다. 고기를 구워주던 미덕이가 "선생님이 저를 마을금고에 취직시켜 주셨잖아요"라고 말했지만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것은 그것뿐만 아니다. 미덕이가 자신의 스토리웹에 올린 글을 보여줬다.

"꿈많던  고교시절 ~"

"미덕아! 넌  대학을  갈려거든  국어국문학과나 아니면  글쓰기를  배워보거라" 하시던 담임 선생님 말씀  한마디에 '아~~!! 내가  글쓰는  재주가 있나보다' 하고 의심 한 번도 없이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은 꼭 가져보리라 하는 게 꿈이 되어서 지천명이 넘은 나이에 정말 소원하던 시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으로 된 시집도 한 권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꿈 많던 소녀와 글 쓰는 사람이 되어보라 하시던 선생님과 30년 만에  조우했습니다. 30주년 기념 동창회에서"

"다른 친구들보다 5~6살 많아 학교에서는 동창이지만 사회에 나오면 선배가 되니 모임에 나오기가 쉽지 않은 사정 때문인지 친구들 모습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섭섭했다"는 박미덕이는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르며 울컥해 눈물을 훔쳤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 50이 넘은 중년 부인이 되어 꿈이었던 시집도 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봉사활동단체인 국제와이즈맨 클럽 여수앙상블회장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25세에 고등학생이 된 만학도 제자

올해 나이 56세인 박상용 제자. ~씨라고 부르기도, 이름만 부르기도 난처하다. 군입대 전 대우조선에 근무하던 중 상급자의 갑질에 사표를 낸 그는 25세에 고등학교 1학년이 됐다. 내가 군대를 갔다 오지 않고 고등학교에 부임했더라면 동갑이 될 뻔한 학생이었다.

나이는 많지만 새까만 후배들과 공부를 하면서도 교사들에게 깍듯이 예절을 갖췄던 그는 현재 여수 도시가스협력업체 이사와 여수시 새마을협의회장을 맡으며 봉사활동에 앞장선다. 1300명 회원의 회장인 그는 벌써 딸을 시집보내고 미혼인 아들딸이 있다. 박상용씨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 그때는 남의 집에서 식모를 하며 학교를 다닐 만큼 어려운 학생들도 있었지만 정으로 살았어요. 하지만 핸드폰과 자가용이 있어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각박한 세상이 되었어요."

제자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며 제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서로가 어려워 애틋하게 여기며 아껴주던 인정은 사라지고 메마른 세상이 되었다. 왜일까? 자본에 속아서일까?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박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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