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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은 항상 달콤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쉬는 게 지루할 만큼 늘어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산책을 나가곤 한다. 주섬주섬 널브러진 옷가지를 챙겨 입고는 집을 나선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는 산책로를 터덜터덜 걷다보면 지루함이 살짝 가신다. 익숙할 만큼 익숙해졌지만 집에서 뒹구는 것보다는 산책이 덜 지루하니까.

십여 년간 한 동네에 살다보면 산책하는 길 곳곳에 기억이 묻어 있다. 눈가에 머무는 풍경에서 옛 자취를 읽어내다보면 지루할 새가 없다. 나는 옛 일을 쉽게 잊는 편이다. 잊는다기보다 묻어둔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장소나 물건 같은 매개물에서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산책은 길가의 풍경에서 추억을 캐내는 일종의 놀이다.

음식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엄마의 맛을 느낀다면, 순간 엄마와 관련된 기억이 솟구쳐 오른다. 옛 연인과 자주 갔던 음식점에서 옛 연인이 좋아했던 음식을 먹었을 때도 기억은 가슴 깊은 곳에서 제멋대로 튀어나온다. 이렇듯 음식은 기억의 프리즘 중 하나다. 왜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는 제목의 책도 있잖은가.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지만, 그 중에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이 있다. 누구나 하나쯤은 품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메뉴는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엄마의 밥상일 수도, 먼 타지 여행의 고단함 속에서 먹었던 컵라면 하나 일수도,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3개를 받은 레스토랑에서 맛봤던 음식일 수도 있다. 당신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무엇인가.

꿀떡 넘기기보다 꼭꼭 곱씹어보기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책표지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책표지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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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박완서, 성석제 등의 작가들을 비롯해 김진애 도시건축가, 김갑수 평론가 등 여러 유명인사가 자신만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에 대해 쓴 글을 엮은 책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글을 쓰기 위한 자료를 찾으려 이리저리 인터넷을 배회했다. 그 와중에 발견한 것은 이 책이 새로 나온 것이 아니라 개정판이라는 사실이었다.

왜 지금 시점에 개정판을 낸 것일까. 짐작컨대, 현재 대중문화의 추세 때문일 것이다. 요즘 TV에서는 음식들의 향연이 한창이다. 과거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먹방'의 인기를 이어, 현재는 셰프들의 현란한 요리 실력을 자랑하면서도 시청자에게 쉽고 맛있는 요리 레시피까지 알려주는 '쿡방'이 대세다. 이 책과 지금의 대중문화 트렌드, 딱 어울리지 않는가.

더군다나 개정판에는 박찬일 셰프의 글을 덧붙였다니 현재 대중문화의 흐름에 편승하기 위해 출판사에서도 상당히 신경 쓴 듯하다. 하지만 단지 트렌드를 따른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를 손쉽게 평가 절하하는 것은 성급하다. 지금 유행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 책만의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음식에 관한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음식이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 사유하게 만든다. 맛에 빗대자면, 현재 유행하는 TV 예능프로그램이 꿀떡 넘기게 하는 화려한 맛이라면, 이 책은 여러 번 곱씹게 만드는 은은한 맛이다. 개인적으로는 휘황찬란한 TV 예능프로그램의 눈부심을 조금은 환기시킬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엄마 밥상

에스프레소의 세밀한 맛을 깊게 파고들어가기 위해 커피머신까지 국외에서 공수해오는 김갑수 평론가, 우연히 들른 묵밥집의 묵밥 맛을 잊을 수 없어 제갈량의 팔진도 같은 경기도 길을 헤메고 다녔다는 성석제 소설가, 일본에서 이웃과 정을 나누며 먹었던 나베 요리를 떠올린 고경일 시사만화가까지. 다양한 밥 한 그릇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엄마 밥상이었다. 지금 세상의 셈법으로는 멋없고 투박한 엄마 밥상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남이 보면 당연히 화려한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에 비해 엄마 밥상은 볼품없다. 하지만 엄마 밥상의 맛은 자식이라면 낙인처럼 혀에 박힌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박찬일 셰프는 요리를 '집안 내림'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누군가 꼼꼼히 조리법을 적어서 물려주지 않아도 그 맛이 혀에 누적된다는 뜻"이며 "맛은 지독히도 보수적이어서 좀체 자기 성문을 열지 않는다"(224쪽)는 것이다. 우리가 엄마 밥상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것은 나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누가 뭐래도 엄마 밥상이 최고인 이유다.

그렇다면, 나는?

자,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볼 차례다. 나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뭘까. 일주일에 한 번씩 먹을 만큼 좋아하고 뜯는 맛이 일품인 치킨일까. 도쿄로 여행을 갔을 때 시부야에서 먹었던 초밥일까. 좋아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데려갔던 비싼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일까.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고개를 젓는 횟수도 함께 늘어난다.

뇌리에 박혀 있는 기억들은 대부분 맛있는 음식일 뿐이다.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가슴 깊은 곳에 상흔처럼 새겨져 있다. 내가 죽기 전까지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 엄마가 해준 카레, 엄마가 해준 닭볶음탕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한 번 떠올려보시라. 당신만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어떤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박완서 외 12명 씀/ 한길사/ 2015. 9/ 정가 13,000원)

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박완서 외 지음, 한길사(2015)


태그:#엄마 밥상, #박찬일,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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