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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일본인 관광객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일본인 관광객들 ⓒ 황보름

701번 동일주 시외버스를 타고 달리고 또 달렸다. 제주 시내에서 20분마다 출발하는 동일주 버스는 버스를 타고 제주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버스 노선이다. 그만큼 이용자도 많고, 또 그래서 배차간격도 짧다. 이 버스를 타고 함덕 해변, 김녕 해변, 월정리 해변을 지나 한 시간 삼십 분만에 세화리에 도착했다. 세화리엔 세화 항구, 세화 해변이 있고, 또 내가 묵을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바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키 낮은 가옥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모습만 보일 뿐, 게스트하우스처럼 생긴 건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앱을 꺼내 위치를 파악해도 근처라는 말만 되돌아 왔다. 또, 헤매기 시작인가 싶었다.

그러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세 명의 서양인이다. 체크아웃하고 떠나려는 듯 보이는 그들이 서 있는 곳, 여기가 바로 내가 찾던 게스트하우스일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이번 게스트하우스는 일반 가옥을 고쳐 만든 터라 겉에서 보면 제주 가정집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세 명의 서양인들을 쳐다보며, 그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나를 쳐다보며 서로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들, 떠나는 날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걸까. 각자의 손엔 막걸리 한 병씩이 들려있다. 그리곤 과감히 나발을 분다.

"첫날을 기념하며 한 모금 어때요?"

게스트하우스를 들어서자 서글서글한 눈빛의 남자 게스트가 내게 막걸리를 내밀며 말했다. 나는 '지금이 몇 시인데 너희 이러고 있니?' 하는 눈빛을 보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됐어요"라고 대답하곤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섰다.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서자 한 남자가 슬리퍼를 끌고 나와 내 여행용 가방을 받아 들고는 식사도 하고 쉴 수도 있는 휴식 공간으로 안내한다. 오늘 밤에 막걸리를 함께 마시게 될 그는 이곳에서 잠시 스태프 일을 하는 팔자 좋은 예비 경찰관이었다. 휴식 공간에서 사장님과 인사를 한 후 방을 배정받았다. 오늘은 4인실이다.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버스 시간표를 꼼꼼히 살폈다. 오늘은 만장굴과 비자림 두 곳을 갈 예정이다. 여기 세화리에는 한 시간에 한 번꼴로 만장굴로 가는 버스가 지나간다. 제주 시내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 만장굴로 가려면 차를 빌리거나, 이렇게 순환 버스가 자주 다니는 곳에 묵으면 된다.

시간표를 들여다보니 20분 안에 버스가 도착할 것 같기에 얼른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사장님이 일러준 버스 정류장으로 뛰듯이 걸었다. 놓치면 또 한 시간이다. 다행히도,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이날부터였던 것 같다. 버스만 타면 졸기 시작했던 것이. 버스의 불편한 의자가 안락한 침대 못지않게 잠의 세계로 이끌었다. 하지만 고개를 휘저으며 그렇게 좋다가도 내릴 때쯤이 되면 신기하게도 눈이 떠지곤 했다. 피곤과 긴장의 느슨한 조화가 여행을 제대로 인도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냉장고 속 같던 만장굴의 시원함

 만장굴 내부 모습.
만장굴 내부 모습. ⓒ 황보름

 만장굴 내부에 마련돼 있는 쉼터
만장굴 내부에 마련돼 있는 쉼터 ⓒ 황보름

버스에서 내리자 유독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태양을 피할 생각에 만장굴 입구까지 잰걸음을 쳤다. 관람을 온 사람들이 만장굴 입구 주변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보인다. 얼른 표를 끊고 만장굴로 들어갔다. 만장굴의 평균 온도는 15도 내외란다. 더위를 피하기엔 최적인, 에어컨이 필요 없는 천연 그늘인 셈이다.

제주도 화산의 특징은 오름과 용암동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제주도 북서쪽과 북동쪽에는 80여 개의 용암 동굴이 발달해있다. 그중 하나가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만장굴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더욱 위상을 떨치고 있는 만장굴의 길이는 총 8929m로, 이웃한 김념사굴과 개우젯굴을 포함하면 1만3422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이다. 만장굴의 높이는 보통 6m, 폭은 보통 4~5m 정도이다.

처음에 만장굴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마냥 재미있는 이름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그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아주 깊다'라는 뜻의 제주어 '만쟁이'를 이용해 주민들 사이에서는 '만쟁이굴'로 알려졌다가 1958년이 되어서야 만장굴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만장굴 입구와 이어져 있는 철제 계단을 내려가니 금세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아 온다. 마치 거대한 냉장고 속으로 들어선 것만 같다. 동굴의 크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컸고, 첫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계단에서 내려와 보게 된 만장굴은 현실임이 분명했지만, 거기 서 있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시간의 흐름을 생각나게 하던 만장굴

 만장굴 끝에 서 있는 용암기둥
만장굴 끝에 서 있는 용암기둥 ⓒ 황보름

화산이 폭발하며 용암이 분출됐고 지표로 분출된 용암은 계곡이나 하천을 따라 흘렀다. 그러다 대기와 접한 표면은 급속히 냉각되어 굳어졌고, 반면 내부는 고온을 유지하며 계속 흘러갔다. 그렇게 용암이 흘러가고 더 흘러가다 아무것도 흐를 것이 없어지자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나중에 사람들에 의해 용암동굴이라 불리게 될 이 공간은 그렇게 한참을 혼자 살아냈다.

그러다 제주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 호기심과 모험심이 가득한 제주 사람들은 제주 이곳저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왠지 위험해 보이는 이곳 만장굴까지 사람들은 탐험을 계속해 나갔다. 그렇게 만장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제 이곳은 더는 탐험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화산이라든지, 용암이라든지, 세계문화유산 등의 이미지를 안고 사람들은 만장굴을 경험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경험을 위한 만장굴은 더는 위험하지 않다. 내부를 밝히는 빛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우리는 안전하게 만장굴 내부를 걸을 수 있다.

만장굴을 걸으며 느낄 수 있던 것은 추위뿐만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었다. 어마어마한 시간이 흐른 덕에 이제 용암동굴의 내부를 용암이 아닌 사람이 흐르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만장굴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그래서 왠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만장굴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흐름 속으로 그저 빠져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70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만장굴을 겨우 한 시간 남짓 걷는다고 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그저, 시간이란 개념을 어렴풋이 한 번 더 떠올려볼 수 있을 뿐.

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이제는 춥다 못해 몸이 떨려왔다.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650m 지점에 이르자 춥다고 찡얼거리는 딸을 둘러업고 가는 아빠를 볼 수 있었다. 850m 지점에 이르자 욕 비슷한 말을 내뱉으며 몸을 주무르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나도 더는 참지 못하고 가방에서 점퍼를 꺼내 입었다. 동굴 벽을 손으로 만지기도 하고, 쉼터 비슷한 곳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심각하게 공기를 들이마시기도 했다. 그러면서 드디어 만장굴 끝에 도착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7.6m 높이의 거대 돌기둥. 세계적으로 가장 긴 용암 기둥에 속한다는 이 기둥은 천장 틈으로 흘러들어온 용암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굳은 것이라고 한다. 사실 만장굴은 돌기둥 뒤로도 죽 이어져 있지만, 관람객들은 이곳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더 나아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려 관람객은 그저 연신 사진을 찍어댈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돌기둥을 감상해보려 했지만 뒤에서 뭔가 시끄러운 기운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동굴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거대 소음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서서히 소음의 정체가 밝혀진다. 고등학생 무리다. 한두 반도 아닌 듯 그 수가 엄청나다. 나는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미친 듯 만장굴 입구 쪽으로 뛰듯이 걸었다. 하지만 만장굴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남자 고등학생들의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용암 기둥 앞을 지키고 있던 선생님과 눈인사를 마친 아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입구를 향해 다시 돌아 나오고 있었다. 추위가 아이들에게 더 힘을 실어주고 있는 듯했다. 각종 욕을 다정하게 나누며 아이들은 나란 존재는 아랑곳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둘러쌌다. 여학생 무리까지 합세했다. 이렇게 나는 몇백 미터를 소음 속에 갇혀 이동해야 했다.

아, 드디어 입구다. 철제 계단을 아이들과 함께 올랐다. 입구를 나서는 아이들은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욕을 나눈다. '아, XX. 짜증 나. 밖은 또 왜 이렇게 더워!' 아이들 말대로 정말이지 짜증을 유발하는 뜨거운 햇볕이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개인블로그에도 중복게재합니다.



#만장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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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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