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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사장님과 나는 이제 매일 아침 얼굴을 맞대고 오늘의 일정을 상의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제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오는 날 보며 사장님은 "어디, 여행은 잘 했나요?"라고 물었고, 나는 "만장굴에 못 갔어요"라고 대답했다.

"왜요?"
"버스가 없던 걸요."

남 사장님은 한 2초 아무 표정 없이 날 바라보다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라고 말했다. 남 사장님의 말을 따라 나는 정말 어젯밤 혼자 맥주를 마시며 잘 쉬었다. 그렇게 오늘 다시 만난 우리. 남 사장님은 다짜고짜 사라봉을 추천해준다. 나는 남 사장님이 내려준 커피를 홀짝이며 지체 없이 물었다.

"사라봉이 뭐죠? 아니, 무엇보다 여기서 쉽게 갈 수는 있나요? 네?"
"근처에요. 가까워요. 버스로 가면 돼요. 사라봉은 말이죠. 제주도민들이 아주 사랑하는 오름이에요. 일상과 접해 있어 매일 같이 오르고 또 오를 수 있는 오름. 매일 보니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그런 오름이죠."

거실에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때문일까. 사장님의 대답은 나의 거친 질문에도 불구하고 오늘 따라 너무 낭만적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오름이라니. 친절하긴 했지만 표정만은 무뚝뚝하던 남 사장님이었다. 그런 사장님의 얼굴에 오늘은 미소가 어려 있다. 사라봉을 생각하니 미소도 나는 걸까. 아니면 사랑 운운한 게 본인도 부끄러워서? 그것도 아니라면 내게 조금은 정이 든 건가. 

제주에는 장기수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밤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이미 3박을 묵었고 마지막 1박이 남은 거다.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선 3박 이상을 묵는 건 꽤 드문 경우에 속한다. 보통 1박이 가장 많고 2박도 거의 없는 것 같다.

물론, '장기수'는 예외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장기수를 두 명 만났는데, 장기수란, 한 게스트하우스에서만 아주 오래도록 묵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얘기를 들어보니, 장기수란 타이틀을 달려면 그래도 한 달 가까이는 인내심을 갖고 묵고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장기수의 특징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자면. 보통 장기수는 본인이 '나, 장기수요'라고 소개를 하기 전엔 장기수라는 게 티가 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결코 게스트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장님의 얼굴을 보기 전엔, 그들이 마치 사장님 같고, 사장님의 얼굴을 본 후엔, 그들은 마치 스태프 같다. 말을 여러 번 섞는다 해도 그들의 정체는 쉽게 탄로나지 않는다. 게스트하우스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다 꿰뚫고 있어 웬만한 건 척척 다 대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게스트다. 그러니 분명 사장님, 스태프와의 차이점이 있긴 하다. 그건 바로 그들의 '놀멍쉬멍' 자세다. 사장 아니면 스태프 같긴 한데 왠일인지 일은 안하고 영 밍기적거리고만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장기수다.

그들의 이러한 '놀멍쉬멍' 자세는 다른 게스트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빡빡한 일정에 스스로도 지쳐있을 즈음 장기수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면 자연스레 자신의 여행 스타일을 재고해 볼 수도 있다. 재고해 보고 싶지 않더라도 장기수랑 같이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보면 다음 날 일정은 그냥 '놀멍쉬멍'이 돼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장기수를 보게 된다면 그들과 꼭 친해지도록! 역시 제주에선 '놀멍쉬멍'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게스트하우스 그 자체와 그곳의 분위기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정이 들어 버리는 데에는 3박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사장님 내외분도 내게 조금은 정이 들지 않았을까? 혹시 나 혼자 정이 들어 이렇게 느끼는 건가?

제주도민의 일상과 밀접해 있는 사라봉

 사라봉 올라가는 길
사라봉 올라가는 길 ⓒ 황보름

오늘도 어제와 같이 남 사장님만 믿고 사라봉으로 향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눈이 아플 정도로 뜨거운 햇볕이 제주를 달구고 있었다. 어제의 비와 추위는 이미 저 먼 과거가 돼버린 듯했다. 가벼운 반팔 티에 반바지를 입었는데도 옷이 버겁게만 느껴진다. 우선은 시내 쪽으로 버스를 타고 나간 뒤 그곳에서 다시 사라봉 방향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한 시간 정도 달려 사라봉 정류장에 도착했다. 260m만 걸으면 사라봉 입구이다.

세상엔 기가 막히게 길을 잘 못 찾는 사람도 간혹 있지 않나. 내가 그런 사람이다. 260m 앞에 있다는 사라봉 입구를 찾는 데 아침밥으로 보충된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다행히 제주도민을 만났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엉뚱한 길로 들어서 한참을 헤맬 뻔했다.

오름의 존재를 인식하고 오름을 오르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난 몇 번의 제주도 여행에서도 성산일출봉을 오르긴 했지만, 그땐 그저 경치 좋고 아담한 (그러나 오르기에는 '빡센') 언덕을 오른다는 생각뿐이었다. 성산일출봉도 오름이란 걸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았다.

사라봉은 남 사장님의 말처럼 제주도민의 사랑을 흠뻑 받는 오름이다. 또 남 사장님의 말처럼 제주도민의 일상과 아주 밀접한 오름이기도 하다. 사라봉 전체가 체육공원인 사라봉공원으로 조성돼 있어 근처 도민들은 산책겸, 운동겸, 밤바람 쐴 겸, 이곳 사랑봉을 일상처럼 오른다. 그래서인지 내가 간 날도 가족 단위로 오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라봉엔 올레 18길도 접해 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오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뿐해 보이기만 한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여느 공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등산복 입고 체조하는 아저씨들이 공원에 마련된 각종 기구들을 5분 간격으로 이용하며 연신 몸을 풀고 있었다. 그 옆 벤치에는 김밥을 싸들고 온 앳된 커플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의 공간엔 나무와 나무가 뿜어내는 순수한 공기가 가득 차 있다. 더운 날씨였지만 나무 그늘에만 들어서면 금세 땀이 식고 기운이 났다.

 저기 보이는 것이 제주항이다
저기 보이는 것이 제주항이다 ⓒ 황보름

사라봉을 오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라봉은 일몰 때 오면 특히 좋은 곳이다. 제주에서는 '영주십경'이라고 경관이 특히 뛰어난 열 곳을 지정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라봉에서 보는 저녁 노을(사봉낙조)이다. 성산일출봉의 해돋이, 정방폭포의 여름도 영주십경에 포함되어 있다.

이미 사라봉에 접어들었는데도 어떻게 사라봉 정상에 오를 수 있는지 헷갈렸다. 사라봉과 연결되어 있는 별도봉으로 향하는 길, 그냥 둘레길, 체육관 가는 길이 서로 다른 쪽으로 뻗어 있었다. 길을 잃은 아이마냥 약간은 풀이 죽어 이쪽, 저쪽을 기웃거리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라봉 정상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저기요."

제주도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올라가니 확실히 이쪽이 맞는 것 같았다. 태양과 사투를 벌이며 올라간 곳엔 아기 배처럼 불룩한 지형이 이곳이 정상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아기 배처럼 좁은 공간이다. 마땅히 쉴 곳도 없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1분도 채 머무르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띠고 있었다. 더위 때문일 테다. 나도 너무 더워 주위 경관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쫓기듯 내려와야 했다.

 여기가 별도봉 정상이다
여기가 별도봉 정상이다 ⓒ 황보름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여행자의 특권

사라봉공원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위의 글에 고개가 갸웃거려질 테다. 사라봉 정상이 아기 배처럼 좁다고? 그래, 아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사라봉 정상이라 생각하고 오른 곳은 별도봉 정상이었고, 등산복 입고 체조하는 아저씨들이 나무에 등을 치던 곳이 사라봉 정상이었다. 나는 눈을 버젓이 뜨고도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왔다 갔다 힘만 뺐던 셈이다.

사라봉 정상을 그저 쉬어가는 언덕쯤으로, 별도봉 정상을 사라봉 정상으로 오해하고 내려온 난 사라봉을 제대로 즐기고, 느끼고 온 것이 맞을까. 성산일출봉을 섭지코지로 알고 갔다 온 사람은 도대체 어딜 갔다 온 거라 할 수 있을까! 처음엔 내가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속이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금세 긍정적인 생각이 나를 다독인다. 사라봉이든 별도봉이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어찌됐건 나는 사라봉에 올랐던 것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 댈 수는 있지 않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여행자의 특권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맨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풀어내는 것이 또 여행자의 역할 아닐까. 물론, 대부분의 여행자는 나처럼 높이 148m의 오름도 제대로 오르지 못해 길을 잃거나 헤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엔 기가 막히게 길을 잘 못 찾는 사람도 간혹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여행을 하면 이런 여행자가 된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니 남 사장님이 "어디, 여행은 잘 했나요?"라고 물었고, 나는 이번에는 "네"라고 대답한 뒤 방으로 올라왔다.

 게스트하우스 앞 밤바다. 저 멀리 고기잡이 배들이 지평선의 별처럼 떠 있다.
게스트하우스 앞 밤바다. 저 멀리 고기잡이 배들이 지평선의 별처럼 떠 있다. ⓒ 황보름

커다란 방을 혼자 쓰는 호사를 마지막으로 누리며 가지고 온 노트북을 좀 하다가, 밖으로 나가 밤바다도 좀 구경하다가, 맥주도 좀 마시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침을 먹고 있는 내게 남 사장님이 묻는다.

"오늘은 어디를 가시나요?"
"만장굴하고, 비자림이요."

남 사장님은 활짝 웃으며 내가 오늘 가서 묵게 될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한다. 두 분이 친분이 있다는 말도 덧붙이며.

체크아웃을 하기 전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근처 커피숍에서 달콤해 보이는 조그마한 케이크 세 개를 샀다. 지난 4일간 나는 얼마나 편안했던가. 또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래서 얼마나 기뻤던가. 내가 느꼈던 기쁨을 어떻게든 누구에게든 표현하고 싶었다.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캐리어를 끌고 1층으로 내려오니 남 사장님은 없고 여 사장님이 처음 그날처럼 나를 문간까지 배웅해 준다. 나는 캐리어를 문밖으로 꺼내놓고 여사장님께 케이크를 내밀었다. 여 사장님은 영문을 모르겠는다는 표정으로 케이크를 받아 든다.

"지난 4일 너무 편했어요. 방도 혼자 쓸 수 있었고, 고마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여 사장님의 얼굴에 웃음이 커다랗게 걸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보름님의 복이죠. 그리고 감사히 먹을게요!"

사장님의 '복'소리에 기분이 더 좋아진 나는 있는 힘껏 웃음을 짓고 문밖으로 나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울음이 날 것 같아 뒤도 안 돌아보고 게스트하우스를 벗어났다. 벌써 그리움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을 나는 게스트하우스를 떠나는 매번 느껴야 했다.

○ 편집ㅣ박순옥 기자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제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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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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