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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영조 18) 영조가 자신의 탕평책을 알리고 편당을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탕평비다. 영조는 논어 위정편 제14장에 있는 구절을 인용하여 직접 써서 성균관의 반수교 위에 세웠다.

탕평비의 내용은 '두루하며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변된 마음이요. 치우치며 두루하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다. 영조는 탕평책에 대한 군주의 관심을 과시하고 당시의 최고학부인 성균관 유생들에게 경계심을 주기 위해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건립한 것이다.

영조어필 영조어필 특별기획전
영조어필영조어필 특별기획전 ⓒ 한정규

수원박물관 1층 '영조어필' 특별기획전에 가면 볼 수 있는 영조의 친필 글씨이다. 이곳에선 학문과 문예를 중시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조선 제21대 임금인 영조(1694-1776)의 글씨를 주제로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영조는 탕평 정치를 표방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고, 검약한 삶을 통해 모든 이에게 모범을 보인 왕이었다.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여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또한 자신과 왕실을 단속하는 한편 선왕의 위업을 기리고, 신하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글을 썼다.

효종어필 효종어필
효종어필효종어필 ⓒ 한정규

'영조어필' 특별기획전은 진적, 모각, 탑본 등 여러 형태의 영조 어필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왕들의 어필 여러 점을 같이 전시해 왕이 직접 쓴 글씨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기별 서풍변화도 확인할 수 있다.

기획전은 3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 '열성의 어필'에서는 조선 왕실의 서풍은 옛 명필들의 서법과 선왕들의 어필 계승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우아하고 고상한 풍격을 지닌 조맹부(1254-1322)의 송설체는 왕실에 걸맞은 서풍으로 애호되었고, 고금을 막론하여 법도에 가장 맞는 글씨로 평가되는 왕희지체는 조선 왕실에서도 이상적인 글씨로 받아들여졌다.

영조어필 영조어필
영조어필영조어필 ⓒ 한정규

조선 초기의 어필은 역대 임금의 글씨를 모아 만든 '열성어필'을 통해 감상할 수 있으며, 선조 이후에는 비교적 많은 진적과 모각이 전해지는데, '문종어필 칠언시', '성종어필 칠언시', '선조어필 오언시', '인조어필 오언시', '효종어필 칠언시', '숙종어필 사연잉군시'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2부에선 영조가 재위 52년간 남긴 많은 글과 글씨를 볼 수 있는데, 영조는 통치수단으로 어필을 적극 활용하였다. 영조는 조맹부의 송설체와 왕희지체를 배워 즐겨 썼으며 30-40대에는 꼿꼿하고 긴밀한 짜임을 보이고, 50-60대에는 필획이 유연해지며 70대 이후 만년에는 분방한 운필을 구사했다.

영조가 7세 때 썼다는 '송죽(松竹)이란 글씨가 이채롭다. '증영상', '증승지', '서시옥당', '재정일면칙리전관' 등 영조의 친필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 안복을 누릴 수 있는 전시회 이다.

서시옥당 영조가 1770년(영조 46) 7월 11일 세손인 정조를 데리고 옥당(홍문관)에서 입직 관헌과 야대를 행하면서 내린 어제어필 사언시다.
서시옥당영조가 1770년(영조 46) 7월 11일 세손인 정조를 데리고 옥당(홍문관)에서 입직 관헌과 야대를 행하면서 내린 어제어필 사언시다. ⓒ 한정규

3부 '영조어필의 계승'에서는 영조가 '열성어필'에 더해질 자신의 어필을 미리 모각해 준비해 두었다. 이는 선대부터 이어져 온 '열성어필' 간행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함이며, 정조의 '영묘어필' 간행으로 이어졌다. '영묘어필'에서 드러나는 영조의 서예관과 서풍은 사도세자와 정조의 세손 시절 글씨에 계승되었음을 정조와 사도세자의 글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생존해 있으면 51세가 되는 1785년(정조 9)을 기념하여 무안왕묘 비를 건립하였다. 무안왕은 중국 삼국시대 촉의 장군인 관우의 시호이다. 사도세자와 정조가 숙종의 관우도상명에 차운한 글을 새겨 하나의 비석으로 만든 것으로 사도세자의 글씨는 18세 때 쓴 것으로 필력이 힘차고 왕성해 그의 기상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의 글씨는 안진경체를 바탕으로 세련되고 흐트러짐이 없어 학문과 예술적 재능을 갖추었던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조선 왕들은 어릴 때부터 왕실의 특별교육을 받아서인지 글씨만큼은 정말 잘 썼다. 특히 조선 초부터 중기까지는 조맹부의 유려한 송설체가 교과서처럼 쓰여서 왕들의 글씨도 단정하고 우아한 풍격을 가지고 있다.

'영조어필' 특별기획전은 5월 28일 개막해서 7월 26일까지 계속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 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조어필#수원박물관#서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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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가슴에 안고 살면서 고전과 서예에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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