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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위기를 기회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함께합니다. 그가 품는 희망은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너무나 아파서 가슴이 막막했던 문제들을 해결해 오며, 작기만 했던 가능성은 어느덧 기대 이상으로 실현됐습니다. 그리고 삶의 희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 과정들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중심에는 '사람은 상처 받고 고통만 당하기엔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약 24년(1991~2014년) 동안 조카와 함께 울고, 웃던 나날들의 경험이, 어떻게 풍성한 열매로 자리하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기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기자 말

'아무리 좋은 보석이라도 내 몸에 맞지 않으면 소용없다'란 말이 실감날 때가 있었다.

덕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의 일이다. 한글이나 숫자를 익히기에는 너무나 멀어 보였다. 내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한 덕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한글을 읽고 쓰고, 숫자 1~100까지는 알아야 한다고 여겼다. 덕이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물론 유치원과 속셈학원에서 지도를 받고는 있지만 나는 그것으로 부족하단 생각에 반복적으로 가르쳤다. 급할수록 강압적이 되었다.

그러다 덕이와 함께 다니는 유치원 아이들의 엄마들을 통해서 어떻게 한글과 수학을 익히도록 지도하는지를 물어보았다. 평소에 덕이를 존중하고 싶었고 존중한다고 하면서 학습 면에 있어서는 전혀 덕이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때 나의 모습은 마치 주인공은 조용히 있는데 객이 무대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꼴이었다.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참다 못한 덕이는 나에게 "고모, 나 안 할래요, 힘들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내게서 생각 없이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너가 뭐가 힘들어~."

나는 덕이를 야단쳤다. 어느덧 초등학교를 입학해야 하는 시기는 다가오고, 내 욕심껏 덕이가 따라와 주지 못하자 압박감에서 나오는 감정이었다.

조카 덕이는 나의 거울

입학 앞둔 덕이 잘 할 수 있을까요?
 입학 앞둔 덕이 잘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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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이상했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겉으로 이렇게 모두 드러낸다. 나의 채워지지 않은 욕구(원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상대를 힘들게 할 줄이야... 심리학에서 언급되는 '투사(projection, 개인의 성향인 태도나 특성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그 원인을 돌리는 심리적 현상)'를 나는 아무런 방어력이 없는 가엾은 덕이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심한 태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덕이는 유치원과 속셈학원, 피아노, 태권도에서 하루 종일 학습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을 텐데. 나까지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덕이가 나를 반갑게 여기지 않는 듯한 분위기가 자주 느껴졌다. 덕이는 자기에게 보내는 애정의 진위를 일반 아이들보다 본능적으로 훨씬 빨리 파악하는 능력을 지녔다. 덕이는 오로지 하나의 상황에만 몰입하는 아이였기에 바로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내가 덕이에게 학습의 압력을 가할 때 덕이는 나와 눈을 마주하지 않았으며 "잘자라"고 안아주려 해도 슬쩍 몸을 빼곤하였다. 덕이는 나의 살아있는 거울로, 나의 태도에 대하여 굉장히 빠른 반응을 보였다. 물론 덕이의 그런 반응 덕분에 내가 수시로 나의 태도를 점검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덕이가 나의 태도에 너무나 빠른 반응을 보이니까 덕이와 관련되어서는 매사에 민감해야 하는 부담감이 나를 힘들게 했다. 수시로 나를 점검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는 것은 감사한 일인데도, 덕이의 반응에 한시도 마음을 푹 내려놓을 수 없는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학습에 관련되어 덕이가 "안 한다"고 한 그날 밤에 잠자는 덕이를 바라보며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율동 동작을 못 따라하고 헤매던 덕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의 속은 또다시 덕이에 대한 측은함에 애가 끓는다.

'덕아 그렇겠지, 너가 더 힘들겠지. 몸이 건강하고 기운이라도 있으면 팔팔하게 뛰어놀기라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 텐데, 그렇지도 못하고. 계속되는 외부의 압력('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해야지 왜 그렇게 하니' 등)에 정확한 표현으로 말도 못하고, 저항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니. 미안하다. 너를 존중하지 않았구나...'

그날 밤은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유치원은 개개인을 그나마 관심있게 보고 지도하겠지만 학교, 학교, 학교라... 과연 학교에서 덕이는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적응을 더 잘 하도록 어떻게 나는 덕이를 지도해야 하고 만약에 어려움이 발생하면 나는 어떻게 도와야 할까.

그 다음 날 아침, 잠을 잔 시간은 짧았지만 푹 잤는지 정신이 맑았다. 그렇다. 뭐니뭐니 해도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이제는 '입학하기 전까지'라는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주인공 덕이의 존재 자체에 관심을 두기로 다시 다짐했다. 이렇게 내려놓으니 내 마음도 편하고 얼굴도 더 예뻐 보인다.

상황들이 아프고 절실하다는 이유로 수시로 흔들렸던 나를 추스르고 흔들리지 않을 원칙을 다시 견고히 해본다. 덕이 그 자체가 소중하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태그:#유치원과 학교, #싫어요와 미얀하다, #지금과 여기, #현재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소중함과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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