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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골(용부원3리) 죽령산신당에서 본 텃골이다.
텃골(용부원3리)죽령산신당에서 본 텃골이다. ⓒ 김경진

죽령역 마을을 내려와 다시 5번 국도와 만났다. 5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텃골'이 나온다. 용부원3리에는 '텃골'과 '매바위'라는 자연부락이 있는데, 텃골은 그 첫 번째 마을이다.

텃골은 5번 국도 아래로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은 사과 과수원으로 둘러져 있었고, 주렁주렁 열려 있는 감이 마을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마을 앞에는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고 그 너머에는 작은 동산 하나가 자리한다.

이제는 터만 남은 '원'의 추억

윤수경 회장 윤수경님은 단양군의회 의장 출신의 ‘문화관광해설사’다. 또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다.
윤수경 회장윤수경님은 단양군의회 의장 출신의 ‘문화관광해설사’다. 또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다. ⓒ 김경진
나는 텃골을 지나 언덕배기에 섰다. '죽령산신당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이다.

지금 시각이 9시 30분, 나는 이곳에서 죽령고개 정상까지 동행하기로 한 윤수경 회장님을 만났다. 윤수경님은 단양군의회 의장 출신의 '문화관광해설사'다. 또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자, 소백문화연구회장이기도 하다.

나는 그를 '윤 회장님'이라고 부른다. 윤 회장은 나와는 구면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편한 답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윤회장은 죽령산성과 봉화대에 관한 논문과, <단양의 역사와 문화>라는 저서를 펴낸 분이라 이번 답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윤 회장과 함께할 첫 번째 코스는 '용부원터'와 '죽령산신당'이다. '용부원'이란 조선시대 장림역에 딸린 국립숙박시설이고, '죽령산신당'은 나라에서 죽령의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다.

윤 회장은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앞 고속도로 주변이 용부원이 있던 자리고, 그 앞 봉우리에 죽령산신당이 있다고 한다. '용부원터'와 '죽령산신당'은 중앙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우정덕 매바위마을 이장도 만났다. 그가 들려주는 원(院)터도 바로 이곳이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꽤 규모 있는 여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3개의 주막과 양조장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지방으로 출장을 다녔던 관리들의 숙박소다. 일종의 공공여관이었다. 공용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했다. 초기에는 주로 공무를 위한 여관이었지만 차츰 민간인들에게도 숙식을 제공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원(院)이 있는 곳에 점사(店舍)라는 민간주막이나 여관들이 생기면서 원(院)의 역할이 점차 사라지고, 지명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죽령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언덕이었다. 위로는 고개 정상에서부터 아래로는 장림리에 이르기까지 죽령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죽령 자락의 중심지였다.

길손들은 이곳에서 멀리서 오고 가는 손님의 행렬을 한눈에 바라봤을 것이다. 그리고는 탁주 한잔에 시름을 달래며 하룻밤을 쉬어 갔을 것이다. 주모와 탁주와 국밥이 있고, 여관과 마방이 늘어선 '원'(院), 이곳엔 수많은 길손들의 사랑과 애환이 있었으리라.

'민족종교의 전당'을 찾아... 산에 대해 생각하다

죽령산신당 용부원3리 '죽령산신당'이다. 텃골을 지나 중앙고속도로 넘어 있다.
죽령산신당용부원3리 '죽령산신당'이다. 텃골을 지나 중앙고속도로 넘어 있다. ⓒ 김경진

우리는 그 옛날의 '원'(院)터를 뒤로하고 '죽령산신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죽령산신당'은 중앙고속도로를 넘어 작은 동산 위에 있었다. '죽령산신당'까지는 과수원 사이의 'U'자 소로를 따라 내려가서 터널을 빠져나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

나의 기대는 어느 코스보다 컸다. 우리나라 민족종교의 전당(?)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민족종교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교(巫敎)'였다. 우리조상들은 이를 신교(神敎)라고 불렀고, 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은 얕잡아보는 시각으로 무속(巫俗) 또는 무속신앙(巫俗信仰)이라고 불렀으며, 이 이름은 이제 현대인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됐다.

'무교'는 환웅천왕(桓雄天王)과 함께 산신(山神)을 모셨다. 그런데 이 '무교'에 있어서의 산신(山神)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는 소로를 따라 '죽령산신당'으로 올라가면서 '산'과 '산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산'은 우리민족에 있어서 삶의 터전이었다. 우리나라 국토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산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절대적 가치의 대상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산에서 사냥을 하고 열매를 따고 약초를 캤다. 또 산에서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목재와 땔감을 얻었다. 사람이 죽으면 산소를 쓰고, 집을 지을 때도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생각했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산성을 쌓기도 했다. 또한 산속의 시원한 계곡과 숲에서는 휴식도 취한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은 산에 의지하여 살아왔기에 산을 숭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높은 산은 구름을 뚫고 하늘의 신비한 영역에 닿아 있으므로,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신비로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산신은 눈·비·바람 등의 기후를 다스리는 천신과 연관이 깊다고 생각하여 산 정상에서 연기를 피워 기우제를 지냈다. 이와 같이 산정은 신비한 영역이었기에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민족의 '산신신앙'은 사실 건국신화에서부터 시작됐다. 단군신화에는 태백산으로 내려온 환웅이 웅녀와의 사이에서 단군을 낳고, 단군은 후에 아사달로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신라·고려시대의 왕실에서는 명산의 산신에게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왕실에서는 유교이념을 접목한 '산신제'인 국행제를 전국의 명산에서 지냈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를 드렸다.

이와 같이 역대 우리나라의 왕실에서는 명산에 산신이 있는 것으로 믿고 산신께 제사함으로써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다. 명산에는 기은제·기우제·호국제 등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다. 태백산, 마니산 등지에는 아직도 천제단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러한 산신제가 왕실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을마다 산신제는 있었다. 민간 형태로 구체화된 신단수·누석단·신수·당집 등에서의 제례의식은 마을마다 있었다.

이러한 산신신앙은 오늘날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민속이나 무속에 관련된 많은 민간신앙들이 오늘날까지 산신을 모시고 있다. 또 산신신앙은 불교에도 수용되어 웬만한 사찰에는 '산신각'이 다 있다. 뿐만 아니라 '산신제'가 오늘날의 마을전통축제가 된 곳도 꽤 있다.

그 중에서 '강릉단오제'는 '대관령 산신'께 제사 드리고, 마을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을 굿'인데, 그 축제의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 내려와, 지난 200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처럼 산신은 우리민족의 종교생활을 지배해 왔다. 우리민족은 누구나 산신께 기도를 드렸다. '산'은 우리 민족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산신'은 우리 민족에 있어서 믿음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 민족종교는 바로 '산신신앙(山神信仰)'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산신신앙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죽령산신당'을 찾아가는 길이다.


#죽령#김경진의 죽령답사기#죽령산신당#텃골#용부원3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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