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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빌리지의 우편함. 반송할 우편물은 '아웃고잉 메일(outgoing mail)'에 넣는다.
 내가 사는 빌리지의 우편함. 반송할 우편물은 '아웃고잉 메일(outgoing mail)'에 넣는다.
ⓒ 김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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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우편물이 왔다. 하나는 내 것이고 하나는 전 세입자의 것이다. 가끔 전 세입자 혹은 전 전 세입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편물들이 오곤 한다. 광고 우편물은 버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반송함에 넣으면 되니 전 세입자의 우편물이 왔다고 해서 내가 뭘 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은 없다. 그런데 오늘 온 우편물을 보니 몇 달 전 딱 한번의 '번거로운 일'이 생각났다.

 전 세입자의 우편물
 전 세입자의 우편물
ⓒ 김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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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그때와 같은 이름이다. 내가 이 이름을 기억하는 건 어느 공공기관에서 비슷한 간격으로 네 번의 우편물이 왔기 때문이다. 세 번은 반송함에 넣었다. 그런데 네 번째로 또 오니 내가 했던 '반송'의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발신지는 공공기관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이것이 중요한 우편물인지 아닌지 내가 판단할 수 없었다. 결국 빌리지의 사무실로 가서 직원에게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우편함에서 사무실까지는 약 100미터 정도이다. 그 거리를 걸어가면서 머릿속으로 내가 말해야 될 문장들을 만들었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투(to)를 넣어야 하나?'
'아웃고잉(outgoing)은 명사?'
'남편한테 문장을 써달라고 해서 연습 좀 한 다음에 갈까?'
'그냥 이것도 반송함에 넣을까?'
'내가 꼭 해야 될 일은 아니잖아?'

영어문장 만들다 말고 '내 안의 악마'와 '내 안의 천사'가 싸운다. 오기가 생겼다. 한국에서,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교육받은 내가 고작 이 정도에서 나와 타협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머리는 편하겠지만 기분은 좋지 않을 것이다. 나를 한번 이겨보고 싶었다.

"Hi, Can you help me?(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이 상황이 내가 도움을 요청할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라든지 '궁금한 게 있어서 왔는데' 등의 문장을 만들기에는 100미터가 너무 짧다. 친절한 직원은 "물론"이라며 뭐가 문제인지를 묻는다. 그 순간, 걸어오면서 정리했던 문장들이 증발해버렸다. 이런 게 울렁증인가. 나는 기억나는 대로 더듬더듬 혹은, 대충대충 쏟아냈다.

"똑같은 우편물을 세 번 받았어요. 모두 반송함에 넣었어요. 그런데 오늘 또 왔어요. 이게 중요한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다행히 의미가 전달되었는지 내 이야기를 들은 직원은 우편함에 이름을 써 놓았느냐고 묻는다(우편함을 열면 입구 쪽에 거주자의 이름을 써 놓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자신이 집배원에게 연락해서 처리할 테니 우편물을 놓고 가란다. 아주 쉽게 끝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일은 '번거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이었다면 과연 이게 번거롭기까지 한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핑계였다. 영어를 해야 하는 그 상황이 두려워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온 전 세입자의 우편물을 보니 그때의 울렁증이 꿈틀댄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발신지는 DMV(자동차에 관한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미국의 공공기관)이다. 오늘은 반송함에 넣는다. 그러나 이것 역시 두세 번 재 발송 된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그때도 '내 안의 천사'가 이길 수 있을까. 문득, 그 승부가 궁금해진다.


#미국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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