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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작가의 말

창춘

1999년 8월 3일 오후 루쉰공원 윤봉길 의사 기념관 매헌을 둘러보고 곧장 상하이공항으로 갔다. 상하이를 이륙한 여객기는 두 시간 남짓 만에 창춘공항에 닿았다.

 창춘시 인민광장의 전승기념탑
창춘시 인민광장의 전승기념탑 ⓒ 박도
창춘은 동북 지린성(吉林省)의 성도(省都)다.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면서 창춘을 수도로 정하고는 '신경(新京)'으로 고쳤으나 1948년 다시 창춘으로 본래 이름을 찾았다. 우리 일행이 이 도시를 중간 기착지로 정한 것은 동북삼성의 교통요지이기 때문이었다.

동삼성의 으뜸 항일 유적지는 하얼빈 역이다. 일백 년 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장쾌하게 쓰러뜨린 하얼빈 역 플랫폼은 우리 백성들의 울분을 한꺼번에 쏟은 분화구였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동북삼성 첫 답사지를 거기로 정한 뒤 창춘 도착 이튿날 이른 새벽 하얼빈으로 출발했다.

창춘~하얼빈 도로를 승용차로 두 시간 남짓 달린 끝에 마침내 전설처럼 얘기로만 들었던 쑹화강(松花江)을 만났다. 거기서부터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으로 조금 더 달리자, 마침내 어린 시절 사진이나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던 하얼빈에 도착했다.

하얼빈은 헤이룽장성 성도(省都)로 지명은 여진족어로는 '명예', 만주어로는 '그물을 말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도시는 19세기 무렵까지는 자그마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작은 어촌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러시아가 동청 철도를 부설한 뒤, 교통의 중심지가 된 이후다.

이 하얼빈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귀에 익게 된 것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플랫폼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장쾌하게 쓰러뜨린 이후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얼빈 하면, '안중근'을 연상케 된다. 또한, 이 도시 남쪽에는 일제 치하 인간 생체 실험을 한 마루타 부대(제731부대)가 있었던 음울한 곳으로, 겨울이면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린다.

 하얼빈 역(1900년대 초)
하얼빈 역(1900년대 초) ⓒ 눈빛출판사 제공

하얼빈 역

하얼빈에 도착한 뒤 김중생 선생은 동포 사학자 서명훈 선생에게 항일 유적지 안내를 부탁드렸다. 그분은 흑룡강성조선어학회 부이사장, 중국조선족역사학회 이사 등을 역임한 사학자로 특히 안중근 연구 권위자였다.

서명훈 선생은 안 의사가 거사한 지 일백 년이 지난 뒤인지라 그새 하얼빈 역 일대가 몰라보게 변했지만, 다행히 거사 현장인 하얼빈 역 플랫폼만은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했다. 마침내 의거 현장인 하얼빈 역 플랫폼으로 갔다.

만주국 시절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안 의사의 총에 맞아 쓰러진 자리에다 1미터 높이로 유리 집을 지어 놓고 전등을 켜서 표지를 해두었다고 하지만, 중국이 해방된 뒤 그 표지를 지워 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서 선생은 당신의 가슴속에 또렷이 그 표지를 새겨놓고 지난 역사를 자세히 증언했다.

서명훈 선생은 하얼빈 역 안내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을 거기서 멀지 않은 옛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지난날 하얼빈 일대에 살았던 일본인을 보호하던 기관이었지만, 우리나라 독립전사들에게는 소름이 끼치는 원한과 저주의 건물이었다.

그곳의 지하는 취조실로, 안 의사도 거사 후 1909년 10월 30일부터 거기서 일본 검찰 미조부치 타카오의 심문을 받았고, 일송 선생도 한 달 남짓 이곳에서 모진 심문을 받았다. 또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 선생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트과 만주국 주재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어 그곳에서 6개월 남짓 모진 고문에 시달린 곳이라고 했다.

옛 일본총영사관 겉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으나, 지하 고문실은 그새 '화원여사(花園旅社)'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새삼 세월 무상을 절감케 했다(현재는 화원소학교).

 하얼빈 옛 일본영사관(현, 하얼빈 화원소학교. 2009. 10. 촬영)
하얼빈 옛 일본영사관(현, 하얼빈 화원소학교. 2009. 10. 촬영) ⓒ 박도

동북열사기념관

서 선생은 다시 거기서 가까운 동북열사기념관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지난날 하얼빈경찰서였는데, 지금은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순국한 항일열사를 모신 곳이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동삼성에도 침략하여 무수한 백성들을 살해하고 수많은 물자를 약탈해 갔다.

당시 동북 군벌정부는 부패 무능하여 일제에 굴욕적인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고 그들에게 빌붙어 살았다. 하지만 당시 동북의 뜻있는 인민들은 스스로 항일전선을 만들었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도 처절한 투쟁을 펼쳤다. 일제 총칼에 죽어간 사람, 철창 속에서 고문으로 죽어간 사람 ….

 동북열사기념관(1999. 8. 촬영)
동북열사기념관(1999. 8. 촬영) ⓒ 박도

해방 후, 중국 인민정부에서는 이 분들의 넋을 기리고자 이곳에다 동북열사기념관을 만들어 그 행적을 기록하고 유품을 모아 전시하고 있었다. 서명훈 선생은 여기에 모셔진 100여 열사 가운데 허형식·양림·리추악·리홍광·박진우·차순덕… 등 32분이 우리 선조라고 했다. 동행한 이항증씨는 나에게 말했다.

"허형식(許亨植) 열사는 박 선생 고향 분이에요."
"네?"

나는 그 말에 까무러치듯 놀랐다. 이항증 선생은 독립운동가 후손인데다 외가가 구미 임은동 허씨 집안이라, 그 마을 내력은 나보다 더 밝았다.

"임은동과 상모동은 철길 사이로 이웃 동네지요."
"아, 네?!"

나는 그곳을 떠나면서 몹시 부끄러웠다. 남의 나라에서조차 기념관에 모시고, 거기다 고향 어른이라는데, 그동안 '허형식'이라는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반가웠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들은 충절의 고장 내 고향 선산 구미가 현대사에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허형식을 만나다

그날 오후 우리 일행은 하얼빈을 떠나 창춘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군 제731부대(일명 '마루타부대'로 인간생체 실험부대)에 들렀다. 차마 사람으로 태어난 게 부끄러운, 일본인들의 잔학상을 봤다. 그날 밤 곧장 창춘역에서 밤 열차를 타고 연길로 갔다.

그 이튿날부터 연길 일대의 항일유적지인 봉오동, 청산리, 백두산 일대의 항일전작지를 둘러보면서 우리 일행은 고국에서 가져간 술을 그 약사 현장에다 헌작하며 선열들의 명복을 빌었다. 나는 그런 가운데도 줄곧 '허형식'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마침 연길에서 만난 연변대학교 민족연구소 박창욱 교수에게 허형식 장군 얘기를 부탁하자 <중국조선민족 발자취 총서>라는 책을 권했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허형식 장군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허형식 장군 ⓒ 박도
나는 그날 오후 연길 서점에서 산 중국조선민족 발자취 총서4 《결전》화보에서 허형식 장군의 모습을 처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그분의 모습이 어찌나 호남인지 그 인물에 홀딱 반했다. 아울러 현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명맥이 끊어진 1930~40년대의 걸출한 독립전사들의 이름도 읽을 수 있었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서는 김일성·안길·최현·김일·서철, 제2로군에서는 최용건·리학복, 제3로군에서는 허형식·김책 등이 그들이다. 같은 책 263쪽에서는 김우종씨가 쓴 <북만에서 유격전을 견지한 항일연군부대들> 편에서는 혀형식 장군의 장엄한 최후도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연길에서 창춘으로 돌아온 뒤 지린, 서란, 화전, 반석을 거쳐 유하현 삼원포 일대의 항일유적을 답사했다. 가는 곳마다 한 세기가 지난 역사의 현장이라 그 원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옥수수·벼논·해바라기·통나무·초가집·기념비만 보고 그곳에서 헌작 재배 묵념하는 걸로 아픈 마음을 달랬다.

마지막 답사 여정으로 랴오닝성으로 입성하여 왕청문에서 양세봉 장군 석상을 뵙고 선양에서 9·18 기념탐과 삼시협정을 맺은 선양공안국을 보고 이튿날인 1999년 8월 11일에 귀국했다.

순수한 인민의 지도자

나는 중국에서 귀국 후 <항일유적답사기>를 집필하던 중, 어느 날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서 독립기념관 발간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7집에서 '許亨植 硏究(허형식 연구)'라는 논문을 발견했다. 독립기념관 연구사 장세윤 박사가 쓴 논문으로 단숨에 읽고는 복사해 다시 읽었다. 그러자 허형식 장군에 대한 흠모의 마음이 불같이 일었다.

나는 곧장 그 무렵 성균관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인 장세윤 박사를 찾아갔다. 내가 허형식 장군과 동향이라고 하자 장 박사는 초면인데도 마치 십 년 지기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국내에 처음으로 <허형식 연구>를 발표한 장 박사가 허형식을 주목했던 점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항일연군 지도자들이 대부분 북한 출신인데 견주어 남한 출신이다.
둘째, 구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당질이다.
셋째, 항일연군에서 정치 이론과 사상, 대원 교육과 전략전술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넷째, 1940년대 초 최용권 김책 김일성 등과 거의 대등한 고위 간부로 활동했다.
다섯째, 1942년 8월 북만주에서 전사할 때까지 항쟁할 만큼 철저한 적극 무장 투쟁론자였다.

특히 장 박사가 허형식 장군을 높이 평가하는 점은 1940년대 초 무렵 다른 항일연군 지도자들은 일제의 극심한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갔으나, 허형식 장군은 단 한 번도 국경을 넘나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허형식 장군은 끝까지 만주의 백성들을 지키다가 위만군 토벌군에게 장렬히 전사했다는 사실로, 이는 독립전사의 열정과 순수성에서 그 누구보다 앞선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왕산 후손과의 만남(왼쪽부터 장세윤, 허도성, 허벽, 필자. 2000. 9.)
왕산 후손과의 만남(왼쪽부터 장세윤, 허도성, 허벽, 필자. 2000. 9.) ⓒ 박도

임은 허씨 후손들

그 후, 나는 장 박사와 허형식 장군의 임은동 생가와 유족들을 찾아갔다. 고향의 생가는 폐허가 된 채 대나무 몇 그루만 자라고 있었고, 임은 허씨 일족 중 허호씨만이 홀로 고향 땅을 지키고 있었다. 만주로 망명했던 왕산 유족들은 이후 러시아·중앙아시아·중국·북한·미국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나는 이듬해(2000년) 미국 휴스턴에 거주하는 왕산 손자 허도성 목사가 일시 귀국하여 만났다. 그러자 그분은 항일명문 임은 허씨 후손들이 그 새 '일리야' '부로코피' '슈라' '나타샤'가 되었고, 미국에 있는 당신 후손마저도 머잖아 '로버트 허' '벤 허'가 될 판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친일파 후손은 고관대작이 되고, 항일 의병장 후손은 도배쟁이가 되었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의병장 후손이 패인트공이 되어 한 TV 화면에 비친 적이 있었다. 이런 현실을 보고 다음 세대 젊은이들이 또 다시 외적이 쳐들어온다면 누가 총칼을 들고 이 나라를 지키겠는가.

 세계 곳곳에서 고향을 찾은 왕산 유족들(2009. 9. 구미 왕산기념관에서)
세계 곳곳에서 고향을 찾은 왕산 유족들(2009. 9. 구미 왕산기념관에서) ⓒ 박도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들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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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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