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손녀 콩콩이가 탁자를 잡고 일어섰다. 태어난 지 395일 만이다.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성장이 조금은 늦은 편이다. 언니 콩이와 약속했다. 콩콩이가 혼자서 서기 시작하면 축하파티를 열자고.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불러 줄 계획이다.
탁자에 의지한 채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비틀거리다가 결국 넘어졌다. 그리고 다시 탁자를 잡고 일어섰다. 아이들을 돌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소한 것에서의 즐거움, 성장해 가는 손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유아식을 시작했다. 언니 콩이보다도 많이 먹는다. 말은 못하지만 자기 감정 전달은 한다. "맘~마". 소리에 "엄~마"로 알아듣고 딸이 무척 좋아했다. "뽀뽀" 하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나 사람이 아무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잡초에 불과하다. 소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고 행복해하는 자기 콘트롤이 중요한 까닭이다. 사람을 존중하는 세상, 모든 재화나 용역이 우리 인류의 풍요로운 삶의 수단으로만 존재할 때 가능하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휴머니즘에 대한 성찰이 다시 우리의 관심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 이름하에 물질 만능에 길들여졌던 잘못된 인간의 가치를 다시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이번 세월호의 사건이 우리에게 준 교훈이다. "진짜 살인자는 선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어떤 철학자의 글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다. 주변의 소소한 사는 이야기가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유다. 산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고 다니는 어떤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아침 일찍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미화원 아저씨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에서 인간의 참모습을 재발견한다.
가족 나들이를 다녀왔다. 마냥 좋아하는 콩이. 어린이날 겸 어버이날 합동 행사다. 콩콩이도 옷을 갈아입히면 느낌을 안다. 집안에만 갇혀 있다가 밖에 나가니 신이 난 모양이다. 가족이 나들이 가는 것도 오랜만이다.
한 달여를 '멘붕' 상태로 살다 보니 주변을 살펴보지 못 했다. 그 사이, 산과 들에 노랗고 하얀 꽃들이 피고 지고, 봄이 스쳐 지나갔다. 나무들도 이슬 머금은 연초록 잎을 내며 기운차게 솟아오르고 있다.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 숲이 우거진 차 없는 거리를 조금은 천천히 걷고 싶다. 지금까지 너무 숨 가쁘게 살아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급하게 달려온 느낌이다. 때론 숨을 돌리고 휴식을 취하는 것도 삶의 활력소가 되지 않을까.
모처럼 콩이가 아빠, 엄마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다. 유모차에 콩콩이를 태우고 서서히 따라 걸었다. 조금 걷다가 힘들면 대나무 정자에 앉아서 쉬었다. 숲의 고유한 상쾌한 내음이 코끝에 감돈다. 전에 왔을 때는 스쳐 지나갔던 산책길, 주변의 꽃도 보고 바람과도 마주치며 가족과 이야기도 나누며 걸었다.
그래 조금은 천천히 가자. 주위도 살펴보고 휴식도 취하면서, 달달한 삶의 맛을 간 보면서. 어느 작가의 글에서처럼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천천히 차를 몰고, 천천히 책을 읽고, 천천히 밥을 먹고, 천천히 잠을 자고, 그러나 그 천천함이 지나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