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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 미술계의 일꾼' 김용태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이 4일 오전 5시30분께 별세했다. 향년 68세. 유족으로는 부인 박영애씨와 딸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는 '민족예술인장'으로 치러지며 장례위원장은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과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가 맡았다. 발인은 8일 오전 7시.
'민중 미술계의 일꾼' 김용태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이 4일 오전 5시30분께 별세했다. 향년 68세. 유족으로는 부인 박영애씨와 딸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는 '민족예술인장'으로 치러지며 장례위원장은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과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가 맡았다. 발인은 8일 오전 7시. ⓒ 연합뉴스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세월호 침몰로 우리는 백주 대낮에 죽어가는 어린 학생들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책임 방기이고 범죄 행위임을 알면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우주선이 달나라를 가고 화성까지 넘보는 과학 만능의 시대에 죽어가는 바닷속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은 고통이자 슬픔이었다.

인터넷을 열 때마다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한 새로운 의혹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그 의혹들을 접하는 것은 분노였고 또 다른 고난이었다. 국민에게 정신적 트라우마(trauma)로 남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런 와중에 내 눈을 스쳐간 페이스북 글 하나가 있었다. '죽음, 민예총' 등의 단어에 '곰보'라는 낱말이 끼어 있었던 것 같다.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

그리고 한참 뒤, 김용태 씨 별세란 기사가 눈에 띄었다. 나는 이 김용태가 민예총의 김용태 형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 주위엔 그동안 정신을 어지럽혔던 김용태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해바라기 정치인에서 자본주의에 맹종하는 기업인 그리고 곡학아세의 교수에 이르기까지. 민예총의 그 김용태 형이 4일 오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형과 가까이 지냈을 법한 사람이 올렸을 '죽음, 민예총, 곰보' 등의 낱말로 이어진 페이스북에 올려진 글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허탕치고 말았다. 용태 형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은 간간이 들었지만 그가 이렇게 훌쩍 떠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열정적인 그의 삶에서 나는 형을 만년 청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용태 형과의 인연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 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당시 민족미술협의회 회원으로 있던 김용덕의 소개로 용태 형과 안면을 텄다. 작달막한 키에 얽은 얼굴,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어긋나게 박힌 이빨 등. 그야말로 볼품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 감춰져 있는 성정(性情)은 아름답기가 한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었다. 경상도 억양에선 찾기 힘든 고분고분 친근한 억양도 갖고 있었다. 후배들의 어려움을 읽어주는 넉넉함이 있었고 빈한한 이들을 감싸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형은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활동가가 될 것을 늘 강조했다. 그의 앞에서 말만 능한 사람은 호통을 당하기 일쑤였다. 자연히 용태 형을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나이와 성별 구분 없이 그를 '용태 형'으로 불렀다.

나는 솔직히 처음 용태 형을 만났을 때 미술평론가쯤 되는 줄 알았다. 시위 현장에서부터 화가들의 개인 전시회장까지 그의 모습을 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화가라고 했다. 유신 말기부터 전두환을 거쳐 노태우 정권 때까지는 질풍노도와도 같은 격정의 시대였다. 군사독재의 작동이 제 기능을 상실하고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울 때였다.

문화 운동도 예외일 수 없었다. 문학의 자유실천문인협회(뒤에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발전), 미술의 민족미술협의회(사 민족미술인협회로 발전), 마당극과 탈춤 등의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이 민주화 운동의 결실로 건설되었다. 이 운동 단체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용태 형이었다. 그는 스스로 문화 운동의 상머슴이라 했고 우리는 그를 유능한 살림꾼이라고 불렀다. 형이 타계한 지금 생각하니 우리가 형에게 너무 가혹했던 것 같다.

참으로 열심히 산 형이었다. 6.10 항쟁의 산물인 민주쟁취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을 맡아 사회운동과 문화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뒤이어 치러질 대선 국면에서 야속하게도 정치권의 분열은 운동 단체의 분열로까지 이어졌다. 비판적 지지(김대중), 후보 단일화(김영삼), 독자 후보론(백기완)으로 나뉘어 정치권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시했다. 비판적 지지 쪽과 후보 단일화 쪽 모두 용태 형에게 손짓했지만 그는 민중 후보 백기완의 비서실장을 맡아 양쪽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용태 형은 남북통일에도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문화운동가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림이 매개고리가 된 것이지만 형은 1993년에 '코리아통일미술전'을 성사시켰고, 2005년 6.15공동선언 남측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와 대화할 때면 늘 남북의 통일 문제로 이야기가 확장되곤 했는데, 그가 추구하는 삶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미술운동가인 그가 남긴 유일한 작품 'DMZ'도 분단의 아픔을 담고 있다. 형은 통일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이 땅의 민중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많은 지식인 운동가들이 사고(思考)와 이론은 민중적이되 삶은 그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용태 형은 민중적인 삶을 기꺼이 살아갔다. 후배 몇이 용태 형 집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한 단체가 운동 노선에서 오는 차이로 내홍을 겪고 있을 때였다. 은평구 증산동에 있는 허름한 연립주택 2층으로 기억되는데, 빈한함 속에서도 그는 민중과 통일을 호기롭게 운위하고 있었다.

길지 않은 인생이라고들 하지만 평생을 한 우물을 파며 살기가 쉽지 않다. 세상이 다기다양(多岐多樣)해지고 과학과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일수록 더욱 그렇다. 작은 거인 김용태 형은 평생을 한 우물을 파며 지조로 살아왔다. 형이 한 일에 비춰볼 때 원하기만 했다면 알량한 국회의원 자리 하나는 차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형은 그런데 초연했다. 그의 머리엔 언제나 민중의 삶 제고밖에 없었다.

내가 서울을 뜬 지도 15년이 되었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듯이 멀리 사니 따라서 마음도 멀어지게 되는 모양이다. 지인들의 경조사 때나 행사장 등지에서 용태 형을 만나면서도 시간에 쫓겨 깊은 대화를 갖지 못했다. 건강 좀 어떠시냐는 인사성 물음에 그는 늘 '그저 그래'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답할 때에도 암 세포가 형을 괴롭히고 있었을 것이다.

용태 형은 갔다. 시절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때 형은 세상을 떴다.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그는 훠이 훠이 손짓하며 하늘로 갔다. 할 일은 산 자의 몫이다. 그가 보고 싶을 것이다. 그의 민중적 삶이 그리워질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어디서 형을 만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작은 거인 용태 형의 안식을 빈다.


#김용태#민예총#통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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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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