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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의 정치고전중 하나인 '한비자'(韓非子)에는 '역린'(逆鱗)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뜻은 '거꾸로 난 비늘'이다. '세난'(設難)에 나오는 이 문구는 용이라는 기이한 동물은 잘 길들여 타면 권세를 얻을 수 있지만 목 아래 있는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뜻을 전한다.

중국과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차이 중에 하나는 중국이 황제의 절대권력인데 반해, 조선 이후 한국 정치는 왕의 절대권력을 잘 용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도전, 조광조, 김종직 등 조선 유학을 선도해온 이들은 왕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방식을 설계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이런 이념이 흔들릴 때는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 같은 정권 바꾸기까지 심심치 않게 일어났으니 왕 역시 신하들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1959년 지앙시성 루산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에 의문을 제기했던 펑더화이는 이 회의로 비극적인 결론을 맞아야 했다
▲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 의문을 제기했던 루산회의 1959년 지앙시성 루산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에 의문을 제기했던 펑더화이는 이 회의로 비극적인 결론을 맞아야 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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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중국의 황제는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 권위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중국사를  보면 수많은 이들에 간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례가 부지기수다. 그럼 신해혁명과 공산혁명을 치뤘던 당대는 어떨까.

황제라는 절대권력은 사라졌지만 지도자의 습성은 큰 차이가 없다. 중국 군인의 사표 같은 인물 중 하나였고, 마오쩌둥의 고향후배였지만 루산회의에서 낙마한 펑더화이는 마오의 역린을 건드린 인물이다. 류샤오치 역시 마오에게 도전하다가 비극적 결론을 만들었다.

자오쯔양 역시 덩샤오핑의 복잡한 정치적 스탠스를 읽어내지 못했다. 물론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겠지만, 덩은 당시를 중국이 완전히 자유화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고, 결국 자오쯔양은 낙마했다. 당대 가장 복잡한 인물은 보시라이다. 태자당으로만 본다면 그의 부친 보이보는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보다 더 높은 인물이다. 거기에 잘 생긴 외모와 탁월한 두뇌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중국 당대 정치가 경고한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가 건드린 비늘은 중국 정권 전달의 흐름을 막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대 중국 정치 지도자의 전승은 어떤 한 인물의 절대적 복심이나 영향력으로만 나오지 않는다. 위로는 상무위원 회의인 창웨이(常委)에서부터 아래로는 작은 마을 회의에서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앞서는 정책을 가진 자가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런 과정은 수일에 걸친 마라톤 회의를 동반하기 때문에 건강은 그들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그런 것이 가끔은 엉뚱한 데에서 나오기도 한다. 가령 전인대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 흰머리가 난 이들을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시기가 되면 중국 정치인들은 모두 윤기나는 검은 머리를 잘 정돈하고 회의장에 나온다. 검은 머리는 아직 젊다는 것을 표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고, 이 때문에 한국의 천연 염색약이 중국 정치인들에게 가장 선호하는 선물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1966년 당시 76세였던 마오쩌둥이 건강을 과시하기 위해 창지앙을 헤험치는 모습. 이해로부터 문혁이 시작됐고, 10년후에 마오는 영면했다.
▲ 건강을 과시하며 창지앙을 헤험치는 마오쩌둥 1966년 당시 76세였던 마오쩌둥이 건강을 과시하기 위해 창지앙을 헤험치는 모습. 이해로부터 문혁이 시작됐고, 10년후에 마오는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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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위기는 당대의 이야기는 아니다. 마오쩌둥은 정치적 위기였던 1955년부터 1976년까지 10차례 넘게 우한(武漢)에서 창지앙을 수영해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마지막 수영 도하가 1966년 7월 16일로 당시 나이가 76세였으니 그의 노력이 어지간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영역에서 근대의 금기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거쳐 장쩌민으로 이어졌다면, 정치적 사건에서도 마찬가지 흐름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9년 6·4 톈안먼 사건이다.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던 덩샤오핑은 당시 텐안먼 사건의 최고 결정권자였던 것은 정설에 가깝다.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스스로가 희생양이었다는 피해의식이 있었던 덩이 스스로 가해자가 되었던 만큼 중국사에서 이해와 평가는 복잡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대 들어서 이런 사건들보다 민간한 이슈는 소수민족 문제다. 티벳(西藏)이나 신장(新疆)은 지난 몇 년 사이 중국에서 가장 민감한 이슈가 됐다. 베이징 올림픽이 있었던 2008년 봄에 본격적으로 불거진 티벳 문제나 다음해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신장 위그루족 갈등은 갈수록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중국에서는 가장 민감한 이슈다.

지난 수년간 중국 정보 당국으로서는 공항에서부터 시골 버스터미널까지 안전점검 시설을 도입하면서 국가 안전에 공을 들였다. 2014년 3월 쿤밍역 테러처럼 무차별 테러의 방식으로 저항이 나오는 상황을 막지는 못한다. 중국은 결국 더 옥죄는 방식으로 이 지역들을 통제하려 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은 역으로 더 큰 반작용을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당대 중국에서 가장 큰 '역린'임에 틀림없다.

1999년 가을 중국으로 건너가 글은 물론이고 영상, 책 등으로 중국을 전했던 나 역시 이 문제는 가장 큰 문제였다. 중국에 간지 반년만에 현지 한글 신문의 편집국장을 맡았다. 작은 매체가 살기 위해서는 교민사회에 이슈를 만들어야 했고,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싫어하는 중국 당국에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다른 교민 매체가 톈안먼 사태에 관한 사실만을 실었다는 이유로 폐간되고,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은 것을 보면서 이런 사실을 더욱 깊게 확인했다.

이 문제를 제기했다가 필자가 일하던 신문사 관계자들은 불안에 떨었다
▲ 경제위기로 인해 짓다가 만 한 대기업의 건물 이 문제를 제기했다가 필자가 일하던 신문사 관계자들은 불안에 떨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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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널리스트로 갈등을 외면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다. 나는 중국이 가장 예민해하는 부분을 제외한 것들은 가장 민감하게 건들었다. 한국에 대한 부정적 칼럼을 실은 중국 대형 신문사와 싸웠다. 권력층의 비호를 받는 우리 대기업의 문제도 기사화했다. 같이 가는 이들은 불안해 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중국이 역린만 아니라면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영역도 신문에서 방송까지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해 갔다. 다행히 2008년 귀국 때까지 중국과 한번도 갈등을 만든 적은 없었다.

중국과 갈등이 없었다는 것이 훈장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항상 중국에 관해 좋은 것만은 쓴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중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중심을 벗어나 본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과 같이 성장해가는 이웃나라 친구라는 점은 분명히 잊지 않았다. 비판적인 글도 많았지만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이 중국에 관해서 소개했고, 때로는 그런 문제를 짚어줬기 때문이다.

또 중국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했다. 특히 티벳 문제나 천안문 사건 같은 경우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스스로 진보적인 성향이라고 하면서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말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역사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쉽게 예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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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중국, #역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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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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