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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촐한 시산제 상차림 오래 쓰다보니 돼지머리 눈에 붙은 스티커가 어디로 가고 없어서 선글라스를 씌웠다.
단촐한 시산제 상차림오래 쓰다보니 돼지머리 눈에 붙은 스티커가 어디로 가고 없어서 선글라스를 씌웠다. ⓒ 강현호

눈 녹고 봄 오는 소리 들리면 산악회는 분주하다. 올 한 해동안 무사히 산에 다닐 수 있도록 기원하는 시산제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시산제는 자기 암시고 축원이다. 고사상 앞에서 절을 하는 사람이 돼지머리가 소원을 들어주는 데 영험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되새김질하는 일이며 스스로를 다잡는 일이다. 마인드 컨트롤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오랜 전통이 남아 있으니 그 본을 받아 시산제를 치르는 것이다.

그래서 시산제에는 격식이 있고 빼면 안 되는 준비물도 있다. 각 가정마다 제사 상차림이 다르고, 격식에 차이가 있듯 시산제 상차림과 격식에도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맞다 틀리다 따질 것 없이 각자의 산악회가 이어온 전통대로 하면 된다.

내가 속한 산악회에서는 모두들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데 특히 시삽(System Operator의 줄임말로 PC통신 나우누리를 기반으로 탄생한 산악회라서 산악회장을 아직도 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은 꿇어 앉아 '유세차'로 시작해 '상향'으로 끝을 맺는 축문을 읽는다. 그리고 다 읽은 축문은 곱게 보관해뒀다가 산을 내려와 태운다.

또 상차림은 떡·고기·김치·과일이 주를 이루는데, 이때 꼭 빠지지 않는 게 있다. 바로 돼지머리다. 그런데 보통 돼지머리가 아니다. 좀 색다른 돼지다.

우리도 십몇 년 전에는 진짜 돼지머리를 단골식당에 주문해뒀다가 시산제 당일 찾고 그걸 다시 배낭에 지고 산을 올랐다. 돼지머리란 게 워낙 부피도 크거니와 귀가 접히지 않아야 복이 온다는 속설을 굳게 믿었던 터라 시산제날 돼지머리 수송을 담당한 회원은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시산제가 끝나도 떡이나 술과 달리 돼지머리는 처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에 버릴 수 없으니 다시 그걸 지고 내려와야 한다. 무겁기는 지고 올라가나 내려가나 마찬가지. 그래서 돼지머리는 시산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지만, 누구도 맡고 싶지 않은 짐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고백하는데 어느 한 해 내가 그 짐을 맡았다가 종로까지 돼지머리를 들고 왔고 뒤풀이 술자리가 파한 뒤에 술기운을 빌어 조계사 앞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 적이 있다.

이런 상황이니 누구도 돼지머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그때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나온 게 바로 저 돼지저금통이다. 삶은 돼지머리에서 황금 돼지저금통으로 바꾼 게 한 십 년 되나 보다. 가볍고 재생 가능하며 심지어 절값을 넣기에도 훨씬 더 편하다. 혹시 아직도 돼지머리를 어찌 처리해할지 몰라 고민하는 산악회가 있다면 돼지저금통을 적극 추천한다.

그리고 이렇게 축문을 읽고 술을 치고 돼지저금통에 절값 내고 음복까지 다 하고 나면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아 있다. 바로 뒤풀이다. 출처불명의 명언을 응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뒤풀이 없는 산행은 노동'이라고. 1년 내내 산행보다는 도시에서의 술자리가 더 많아 산악회인지 친목회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하지만 산악회면 어떻고 친목회면 어떤가. 만나 즐거우면 됐지. 우리의 뒤풀이는 산행보다 길고도 길다.

누군가는 고루하다고 할 수도 있는 시산제의 전통을 지켜나가되 현실에 맞게 고치고 다듬어서 이어간다. 왜? 고운 얼굴 보고 모여 앉아 먹으며 즐겁게 살아가려고. 좋은 사람들과 하루를 어울리고 나면 일주일 아니 한 달이 활기차다. 그래서 산누리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20년 가까이 한솥밥을 먹는 식구로 지내며 여전히 서로 속박하지 않는 산행을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아날로그캠핑 블러그에도 실렸습니다.



#시산제#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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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기업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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